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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08 - 진짜는 심플합니다.

삼하 18:16~18   그런 다음에 요압이 나팔을 부니, 백성이 이스라엘 사람을 뒤쫓다가 돌아왔다. 요압이 백성에게 싸움을 그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압살롬을 들어다가 숲 속의 깊은 구덩이에 집어던지고, 그 위에다가 아주 큰 돌무더기를 쌓았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망하여서, 저마다 자기 장막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압살롬은,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왕의 골짜기'에 있다. 압살롬이 그 돌기둥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고 한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전쟁은 끝이 납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구덩이에 던지고 그 위에 돌무덤을 쌓죠. 아마도 이것은 어떤 상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부모를 대적하는 패륜아에게 대한 형벌이 적혀 있는데 이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였죠. 압살롬의 주검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그 율법을 따른 표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동시에 압살롬의 비석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압살롬은 본래 아들이 셋이나 있었습니다만 모두 일찍 죽었죠. 그는 자신의 명성에 대한 기록을 남겨줄 아들이 없자 스스로 자신의 비석을 세웠다고 하죠. 스스로 자신의 비석을 세운다는 것도 좀 이상하죠? 자기애가 강하거나 그만큼 권력욕이 대단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현실은 자신의 위대함을 후대에 알릴 비석이 아니라 아버지를 대적하고 욕보인 패륜아의 돌무덤이었다는 것이 씁쓸합니다.

 

사실 모든 이들에게 압살롬과 같은 자기애가 있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자신을 우선시 합니다. 남보다 조금 더 인정받아야 하고, 남보다 조금더 자존심을 세워야 하죠. 그렇지 못하면 괴롭고 힘들어합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자기에게는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내가 틀렸어도 나이기에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옳지 않아도 나이기에 남보다 내 위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고, 감정에 따라 기준이 흔들리는 것 자체가 자기애죠. 남에 대한 변명은 1도 들으려하지 않지만 자신에 대한 변명은 그리도 많은 것이 우리입니다. 남에 대한 잘못은 삼박사일간 말할 수 있어도 자기에 대한 잘못은 늘 이유가 있어요. 그게 압살롬의 비석과 같은 것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기준을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아야 회개가 가능하죠. 주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볼 마음이 있어야 자신의 잘못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함은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가슴을 칠 수 있는 거죠. 그렇지 못하면 늘 말씀 앞에서 딴 사람이 생각납니다. 기도할 때도 늘 남탓이 넘치고요. 변명이 많아집니다. 

 

진짜는 심플합니다. 그리 많은 말이 필요없어요. 내가 하지 않아도 진실은 혼자서 세워지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변명과 이유를 말하려고 하죠. 설명을 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명을 하지 않으면 표현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죠.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어요. 사랑은 결코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화려한 옷이나 큰 소리로 믿음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죠. 믿음은 살아서 역사합니다. 내 삶에 드러납니다. 굳이 떠벌일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그런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살아서 역사하는 사랑 말이죠. 그런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삶에서 언제나 살아 숨쉬며 역사하는 믿음 말이죠. 내가 세운 비석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바닥에 새기신 이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믿음은 말이 필요 없으니까요. 진짜 사랑은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요. 진짜 삶은 화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의 마음은 진짜에게 열려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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