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6. 06:56ㆍ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상 25:1~12 그 뒤에 다윗은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그 무렵에 마온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갈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잘 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가축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였다. 그는 마침 갈멜에 와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며,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다. 이 여인은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다웠으나, 그 남편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하였다. 그는 갈렙 족속이었다. 그런데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다윗이 광야에서 듣고, 자기 부하들 가운데서 젊은이 열 사람에게 임무를 주어서 그에게 보냈다.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을 찾아가서, 나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하여라. 너희는 그에게 이렇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만수무강을 빕니다. 어른도 평안하시고, 집안이 모두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어른의 모든 소유도 번창하기를 빕니다. 지금 일꾼들을 데리고 양털을 깎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른의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을 괴롭힌 일도 없으며,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양 한 마리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습니다. 일꾼들에게 물어보시면, 그들이 사실대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잔치를 벌이는 좋은 날에 어른을 찾아왔으니, 제가 보낸 젊은이들을 너그럽게 보시고, 부디 어른의 종들이나 다름이 없는 저의 부하들과, 아들이나 다름이 없는 이 다윗을 생각하셔서, 먹거리를 좀 들려 보내 주십시오.'" 다윗의 젊은이들이 도착하여, 다윗의 이름으로 나발에게 이 모든 말을 그대로 전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드디어 나발이 다윗의 젊은이들에게 대답하였다.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빵이나 물이나, 양털 깎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다윗의 젊은이들이, 갔던 길로 돌아서서 다윗에게로 돌아와, 그 모든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토요일, 교회 카페에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아시다시피 다림교육에서 온라인 멘토링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지지난주와 지난주, 각각 교육을 마치고 멘토링 준비를 끝냈죠. 그런데 그 멘토링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고등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오셨어요. 난데없이 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시더라고요. 사실 자원봉사자로 참여하였으면 제가 감사해야 할 처지인데 오히려 그 어머니가 제게 감사를 전해 주신 거죠.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자기 아이가 사회에 불만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도 안 나갔다는 거예요. 그의 불만은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 때문이었답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노력보다 신분의 차이에 결과가 좌우되는 것 같은 사회를 용납할 수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다림교육의 멘토로 참여하며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마음의 변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멘토로 참여한 고등학생들에게 주로 꼭 하는 말이 있어요. 그것은 사회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는 말입니다. 목사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말인데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이들이 다 잘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이 다 똑똑하지는 않죠. 모두가 다 다릅니다. 각자의 가진 재능도 다르고 태어난 환경과 배경도 다 다르죠. 그래서 이 사회는 본래 불평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정하다고 하죠. 그것은 물리적인 공정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공정을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 많이 가진 것들을 나누며 서로 협력하고 함께할 때 공정과 평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림교육이 그 터전 위에 있다고요. 아마도 그 말을 들은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바꾼 모양입니다. 엄마에게 불평만 하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켜보겠다고 하더래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감동이 되었습니다. 다림교육에 수혜를 받던 초등학생들이 자라 이제는 다림교육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겠다고 할 때 받는 감동만큼 컸습니다. 이것이 다림교육을 하는 이유였으니까요.
오늘 본문에는 양을 치는 부자 나발이 등장합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에게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부들에게 추수할 때와 같습니다. 한 해의 수확을 거두는 때인데요. 수확들을 보며 감사가 넘치는 시기이죠. 나발에게 지금이 그런 시기입니다. 그는 아주 잘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자 나발에게 도움을 청하는 다윗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어요. 그러나 나발은 일언지하에 다윗의 도움을 거절하죠.
이 땅에서 빈부의 차이를 보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부의 대물림과 마찬가지로 가난도 대물림을 하죠.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대로, 없는 자들은 없는 자들대로, 사회는 고착화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구조적 문제가 되어버렸죠.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는 자리를 잃어버린 것 같이 보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대한 신학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깝고요. 아니, 사라져 버린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말하는 것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형국이 되어 버렸죠.
우리는 공평하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얼굴 생김새부터 상황 및 환경이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많고, 어떤 이는 적게 태어납니다. 어떤 이는 크고, 어떤 이는 작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가 아는 물리적 공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를 통한 '나눔'에서 이루어집니다. 받은 은혜를 나누고, 받은 감사를 나누는데서 하나님의 공평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는데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는 이유가 다 있죠.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다 함은 나를 통해 도움받을 사람들이 내 주위에 많다는 증거입니다. 나에게 재능이 많다 함은 나의 재능을 통해 기쁨을 누릴 사람들이 내 주위에 많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부와, 재능을 나를 위해서만 쓸 때, 우리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나눔이 하나님의 공평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정의와 공평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와 [쩨다카]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웃과 마음을 같이하고 자신을 대하듯 한다는 뜻을 지녔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평이 이루어집니다. 구제와 돌봄은 받은 축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평이 이루어지죠.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신앙이며 사명이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다면 그것은 나누라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받은 것이 많다면 그것은 공유하라는 사인(sign)으로 받아들여야죠.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길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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