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5. 07:11ㆍ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삼상7:1~4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옮겨,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해 세워서, 주님의 궤를 지키게 하였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날로부터 약 스무 해 동안,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의 온 족속은 주님을 사모하였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과 아스다롯 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님만을 섬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낮은 체감온도를 나타내네요.
싸늘함이 몰려옵니다.
가뜩이나 코로나의 재확산으로 가라앉은 분위기가
날씨로 인해 더욱 움츠려 들게 하네요.
그래도 힘내요, 우리.
이제 이보다 더한 어려움도 이겨왔잖아요?
불평으로 해결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오직 감사만이 해결책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돌고 돌아 기럇여아림에 옮겨졌습니다.
기럇여아림이 법궤의 최종 목적지가 된 이유는,
매우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돌려줬습니다.
벳세메스는 블레셋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지역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벳세메스는 하나님의 궤를 실로로 옮기지 못합니다.
이유는,
이미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실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주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벳세메스 사람들은 여전히 블레셋을 의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아니고 블레셋도 아닌 교묘한 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곳이 기럇여아림이었어요.
사실, 기럇여아림은 이스라엘 땅에 속하는 지역이었지만
블레셋으로 인해 점령당해왔고,
당시 여전히 블레셋의 영향 아래 있던 지역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묘한 장소가 되었던 셈이죠.
아무튼 이런 임시적인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20년이 넘었다고 하네요.
잠시일 줄 알았던 것이 훌쩍 세월이 지날 때가 있죠?
곤란한 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심리 때문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가 곤란했을까요?
오늘 묵상은 그 이유를 묻게 되네요.
눈에 띄는 것은 그 임시적인 20년 동안,
'이스라엘이 주님을 사모하였다'는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패턴이죠?
전쟁에 패하고,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하나님을 찾는 습성 말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잃고 나니 정신을 차린 것일까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니 하나님을 부르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제자리에 놓지 못했을까를 찾고 있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불편해했을까?입니다.
이런 질문과 하나님을 사모했다는 증언이 상반되죠?
진정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요?
여기서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첫 일성을 듣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우리가 오늘 질문하는 묵상에 답을 주죠.
"여러분이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없애 버리고, 주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단순히 회개하라는 말처럼 들리시나요?
조금 전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모했다는 기록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무엘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이방의 신상들을 없애 버리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모하면서도,
이방의 신들과 아스다롯 여신상들을 모시고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왜 이런 이중적인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을까?를 비판하기에는,
이는 너무도 익숙한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또한 이 모습에서 한치의 벗어남이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해져 오는 전통적인 미신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세상의 주문들에 귀를 닫지 못하죠.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고,
은혜와 정죄가 늘 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로부터 끌리기 때문이죠.
그것이 무엇이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시소처럼,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라고 하셨죠.
하나를 버려야 다른 하나를 얻습니다.
아니 하나를 잡으면 하나는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를 잡으면 불평이 버려지고요.
사랑을 잡으면 미움에서 벗어납니다.
은혜를 붙들면 불안이 떠나고,
거룩함을 추구하면 여러 추한 잡념들이 사라집니다.
복잡할 때는 단순하게 사세요.
하나만 생각하세요.
다 해결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하나만 하세요.
그리스도인으로 할 수 있는,
내 안의 주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그 마음,
그것만 붙드는 오늘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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