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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빌립보서묵상

[빌립보서묵상12] 다르게 산다는 것은

[빌립보서묵상12] 다르게 산다는 것은

 

빌립보서3:17~21,

17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1.

저는 결혼 초에 미국에서 1년간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미국 생활을 해 보신 경험 있는 분 많을텐데 짧은 시간의 생활로 미국의 이야기를 한다는 좀 그렇긴 합니다.

본래 안 가본 사람이 더 아는 척 하잖아요~

1년 동안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았어요.

대학생활은 아니였고, 선교사 후보생 생활이었습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10가정과 함께 1년을 생활했어요.

그 때, “내가 참 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2.

기숙사가 대학생들과는 달리 2층짜리 독채였거든요?

대신 다 같은 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옆집 불가리아 선교 후보자였던 부부가 초대를 했습니다.

저녁 초대였는데요.

예쁜 두 딸을 둔 나이 지긋한 스캇이라는 부부였어요.

전 기대가 많았습니다. 점심을 굶을 정도로요.

그리고 들어갔더니 정말 파티분위기더라구요.

음악도 흐르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서 이야기 나누고...

들어가자마자 스캇선교사가 파이 한 접시를 주었습니다.

맛있는 애플파이였어요.

난 생각했죠.

“아~ 애피타이저구나~!”

파이 접시를 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도 저는 어떤 저녁이 언제 나올까를 궁금해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데 저녁을 먹을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사람씩 사람들은 가고 파티는 끝났습니다.

저녁을 근사하게 먹을 저의 기대도 그렇게 끝났습니다.

저는 돌아와서 마침 하나 남은 라면으로 허기를 채웠어야 했죠.

 

3.

참 다르죠?

우리는 저녁을 초대한다면 아마도 근사한 저녁상을 차렸을테지요.

그래도 애플파이 한 조각은 아니잖아요?^^

문제는 어느 누구 한 사람 당황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다른 저녁은 없느냐?”

“배고프다”

말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고, 그저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에 더 놀랐어요.

저는 당황했거든요~^^

그렇게 삶의 방식들이 다 다릅니다.

미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죠.

 

4.

저는 거절을 잘 못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그냥 못 보내요.

오지랖이 넓은 건지 눈에 밟히면 잠을 못잡니다.

제 머리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운적은 없는데요.

불의에 저항하고, 공의로운 일에 앞장서는 이들을 보면서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내 먹을 것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아까워요.

그런데 남을 먹이는 데는 빌려서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아요.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밤새 일해본 적이 없어요.

공부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누군가를 위해서는 며칠 밤도 샙니다.

안 그러고 싶은데 잠이 오질 않아요.

 

5.

한번은 어느 대형교회의 부목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가 장소를 옮기고 전체적으로 셋팅을 할 때였어요.

저는 교회의 시각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디자이너를 두자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시각 디자이너가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신앙에서 시각적인 것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중세교회에는 아이콘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요즘 컴퓨터에서 말하는 아이콘 그것입니다.

십자가, 성모상, 예수상, 이런 것들이 아이콘이죠.

이 아이콘을 보면서 스스로 의미와 마음을 갖는 것이죠.

 

6.

제 설득이 통했던지 결국 교회에서 디자이너를 뽑기로 했습니다.

디자이너를 면접하는 일은 제가 했습니다.

지원한 디자이너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경력이 좋은 친구였어요.

솔직히 디자인 개념도 없는 교회, 게다가 박봉인 교회에 올 친구가 아닌거죠.

게다가 알고보니 제 집사람 예고 동창이더라구요.

저는 그 친구의 입장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그 친구에게 오도록 설득한 것이 아니구요.

그 친구의 헌신으로 교회에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년 쯤 지난 다음 그 친구가 제게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 사실 목사님이 처음에 절 맘에 들지 않아 하시는 줄 알았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목사님이 그러셨잖아요. 교회에 만약 온다면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박봉이고, 디자인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네가 개척을 해야할 것이고, 또 애써 디자인 한 것들을 단번에 휴지통에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소리도 들을 것이다. 그래도 하겠는가?”

그 말이 오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는 겁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렇게 돌려 말씀하신 거라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닌 것을 알겠다고요.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순전히 그 디자이너를 위해 이야기 해 준 것인데 그는 그렇게 받았다는게...

 

7.

이런 일 때문에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한번도 교회나 단체, 혹은 다수를 위해 일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늘 제 눈에는 사람이 보이고, 그의 마음이 보이고, 그의 미래가 보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 사람을 위한다면 일을 해야죠.

 

8.

한 달전에 지방에 있는 권사님이 아들내외를 데리고 교회에 왔습니다.

김민재형제예요.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을 돌봐달라고 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교회가 두 분에게 꼭 맞는 교회는 아니예요. 신앙생활하기 좀 힘들거예요. 초신자나 아무도 모르는 분이 오는 경우를 대해본 적이 없어서 우리교회 가족들이 잘 못해드릴지도 몰라요. 새신자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교회로 가세요.”

그랬더니 같이 듣고 계시던 권사님들이 제게 뭐라고 하셨어요.

굴러들어온 가족도 못 받냐는 거죠.

그런데 정말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새로운 가족이 오시면 잘 맞아 주고 계세요?

우리교회가 잘 적응할 수 있는 교회 맞아요?

불편하고 어려운데 여러분이 잘 보살펴 주실 수 있어요?

다른 교회보다 나아요?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좋지만 그분들에게는 바로 말해야 하는 거 아녀요?

 

9.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안 좋으시죠?

“그래도 목사가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 드시죠?

여러분도 이런 오해를 하시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요?

이 때문에 수없이 오해받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은 제가 뭔가 꿍꿍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구요.

어떤 사람은 아예 이용해 먹기도 합니다.

속상하고 바꾸고 싶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저는 그저 “이 땅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하기로 했습니다.

 

10.

저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우리교회보다 다른 교회가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우리 다림교육보다 아이들이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민재형제 내외가 우리교회 나오기로 결정했어요.

이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저의 염려가 기우였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저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1.

바울은 우리를 하늘의 시민권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신 삶은 이 땅에서 사는 사람이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뭔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땅의 사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빌3:18~19,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12.

이 땅의 방식으로 사는 삶, 3가지가 제시되죠.

첫째,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둘째,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셋째는 땅의 것만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시민권자로 사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 땅의 방식을 반대로 풀면 그것이 하늘의 방식이 된다고 믿습니다. 

 

13. 첫째, 자신의 배 채움을 하나님으로 삼지 말라.

 

신앙의 타락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육신적 욕망과 만족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14.

1500년경 네덜란드에 더크 윌렘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세례파 교인이었는데요.

재세례파란 당시 종교개혁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드시 자원하는 심령을 가지고 주께 돌아오는 결단의 세례를 주장했죠.

그러다보니 자연이 이들은 이단으로 몰려서 감옥에 가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더크 윌렘스도 그렇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요.

어느 날, 헝겊을 엮어 밧줄을 만들어서 감옥 탑에서 탈옥을 시도했습니다.

다행이 땅을 밟기는 했는데요. 발각이 되어서 쫓기게 되었답니다.

한참을 뛰었는데 앞에 호수로 가로 막혔습니다.

그런데 살얼음으로 호수가 얼어있는 거예요.

여기서 잡히는 죽는 게 뻔하잖아요.

윌렘스는 죽기 살기로 뛰었답니다.

다행스럽게도 얼음이 깨지지 않아서 무사히 건넜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거죠.

호수를 건너 더 달아나려고 하는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답니다.

돌아보니 자신을 쫓던 경비병이 그만 얼음물에 빠지고 말았던 거예요.

뒤쫓던 다른 경비병은 호숫가에서 발을 동동구르구요.

잘 되었죠?

이제 무사히 도망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윌렘스는 도망가지 못했어요.

그는 다시 호수 얼음 위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호수에 빠진 경비병을 구했습니다.

“모든 생명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자신의 주님이라고요.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았죠.

 

15.

더크 윌렘스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구요?

다시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과 박해 끝에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했습니다.

 

16.

다르게 산다는 것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7. 둘째, 썩을 영광에 몸담지 말라.

 

여러분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알고 계시죠?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행과 긍휼이 돋보이는 구절이죠.

그런데 이 구절이 나온 배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느날,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이 되레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단번에 대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이것이 내용의 핵심입니다.

 

18.

이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면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의문이 들었던 거죠.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 하고 말이죠...

그렇다면 그가 이웃이 누구인지 몰랐을까요?

아니요... 그는 율법학자입니다.

이미 그는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질문에도 서슴없이 대답을 했던 것이죠.

우리는 그 율법학자가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율법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잘 압니다.

문제는 다른 것이죠.

그 율법학자는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묻기 전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10: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이렇게 물었다는 겁니다.

어떤 옳음일까요?

그것은 자신은 이웃을 이미 사랑한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 이웃이 누구였겠습니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나와 같은 편...

나와 다르지 않는 사람, 같은 종교, 같은 교회, 같은 생각, 같은 부류....

자신과 걸맞는 위치, 창피하지 않을 존재, 같은 레벨의 사람들...

그들이 그의 이웃이었습니다.

 

19.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사마리아인과 비교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요.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

소위 구별되었다고 여기는 자들이죠.

자기끼리 모여고, 자기들끼리 노는 그룹 말입니다.

 

20.

섞을 영광이 뭔 줄 아세요?

나에게 뭔가 가져다줄, 나에게 이익이 될 이웃을 두는 겁니다.

내가 사귀고, 내가 나누는 사람들은 나의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죠.

그러니 나와 다른 사람, 내가 귀찮을 사람은 이웃이 못되죠. 

 

21.

저는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더 심한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율법학자는 이 비유에 당혹스럽고 강한 분노가 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는 개만도 못한 존재였거든요.

절대로 이웃이 될 수 없는 존재였죠.

 

21.

하늘의 보석은 내가 상상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은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보석은 내 눈에 보잘 것 없는 자, 작은 자, 하찮고,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나에게 뭔가를 줄 것 같은 당신이 바라보는 그곳에 하늘의 보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작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있습니다.

 

22. 셋째,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다윗은 여러 실수를 한 사람입니다.

그중에 자신이 살고자 이방나라의 용병이 되었던 때가 있죠.

그것 때문에 같은 민족과 전쟁을 할 뻔도 했습니다.

이런 이들 때문에 그를 따르던 병사들에게도 신뢰를 잃어 갔습니다.

다행히 동족과의 전쟁은 피하고 은신처 [사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돌아와 보니, 모든 가족들이 [아말렉]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잡혀가버린 거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다윗의 군사는 쉬지도 않고 이들을 뒤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사울은 3,000군사로 다윗의 군대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광야가 그런 곳이예요.

3일이나 지났는데 400군사로 어떻게 아말렉을 광야에서 찾습니까?

그들은 물 먹을 시간도 없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시간도 없고, 물과 식량도 모자랄 그 때,

달리고 있는 광야 한 복판에 이집트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윗의 가족도 납치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다윗에게 강한 항의도 했죠.

멈추면 겉잡지 못할 수도 있고, 게다가 동족도 아닌 이집트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다급한 상황인데도 길을 멈췄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과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나그네와 고아,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말씀 때문이었죠.

23.

이게 가능합니까?

여러분은 이해가 가세요?

나의 가족 생명이 촌각에 달렸는데 다른 생명을 살리는게 맞는 이야깁니까?

 

24.

그렇게 생명을 살리고 다시 출발하려고 그들이 말에 올랐을 때입니다.

기운을 차린 이 이집트 사람이 말을 합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다윗은 아말렉군사들을 쫓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 이집트 사람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안다고 말합니다.

알고보니 그는 아말렉군사의 종으로 끌려가다가 병이 들어 버려진 겁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힘의 논리, 그것이 아말렉의 논리입니다.

바로 이 땅의 논리이죠.

힘이 없으면 버려지고, 얻을 것이 없으면 버려지는 것이 땅의 논리입니다.

힘이 있으면 굽신거리고, 얻을 것이 있으면 친구가 되는 것이 땅의 논리죠.

 

25.

반면, 다윗은 약자를 돌보는 성경의 논리로 삽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아말렉을 찾아 무찌르고 가족들을 모두 찾습니다.

한 사람도 상한 자 없이 모두다 말이죠.

 

26.

이 땅에서 다르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땅 위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서는 땅의 논리로 살아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들은 땅에서건 바다에서건 하늘의 논리로 살아야 진짜 제대로 사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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