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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빌립보서묵상

[빌립보서묵상10] 우리는 십자가를 꿈꾸고, 하나님은 부활을 꿈꾸시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

[빌립보서묵상10] 우리는 십자가를 꿈꾸고, 하나님은 부활을 꿈꾸시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

 

빌립보서3:4~11,

4    하기야, 나는 육신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7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1.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유명한 심리학교수 [장 데세티]가 있다.

그가 최근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5~12세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 117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종교를 가진 어린이와 그렇지 않은 어린이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일명 [독재자게임]이라고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스티커를 나눠줬는데, 각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나 나눠주는지를 지켜봤다.

이 실험을 통해 아이들의 이타심을 측정해 보는 것이다.

 

2.

이 실험은 무모해 보였다.

왜냐하면 종교를 가진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관대하고 이타적일 것이라는 관념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실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크리스천 아이들은 평균 3.3장의 스티커를 나눴고,

모슬렘 어린이들은 평균 3.1장을 나눈 반면에,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들은 평균 4.1장의 스티커를 나눈 것으로 집계되었던 것이다.

 

3.

이 연구팀은 이 실험을 토대로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들이 종교를 가진 이들보다 더 이타적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발표했다.

물론 단편적이고 편협한 결과일 수 있지만 제법 곱씹어 볼 대목이다.

이 결과가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4.

당신은 바울에 대해서 웬만큼 안다.

그는 가질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오늘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서술한다.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의 사람이었고,

혈통으로는 뼈대 있는 가문이었고,

학식으로는 가장 깊이는 사람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핵심적 권력 안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5.

우리는 성공의 조건들을 말할 때 대부분 이와 같은 것들을 든다.

어제, 교회의 음향장비가 고장 나서 맡기려고 A/S센터엘 갔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30년 만에 만났는데 첫눈에 알아본 것도 이상하다.

계획에도 없던 만남에 몇 시간동안 수다를 떨었다.

지난 30년의 인생을 서로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허나 예외 없이 서로 묻고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자녀이야기다.

연년생 아이 둘을 예고와 외고를 보내고, 지금은 명문대학에 다 진학시켰다.

성공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여 참 부럽고 보기 좋았다.

아마도 이것이 살아온 인생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상징이 아닐까 싶다.

그 상징이 바로 “얼마나 많이 배웠나?” “얼마나 부를 누리나?”

“얼마나 권세를 가졌는가?”에 담겨있지 않겠나?

이와 같다면 바울은 분명 성공한 사람이다.

 

6.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이런 것들이 육신에 신뢰를 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사람이 가지는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런 이로웠던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나는 배우고, 부를 누리고, 권력을 갖는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인생의 이로움이다.

이것을 적대시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은 아니다.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분명 육신을 신뢰하는 가치관에서는 이 문제들이 이로움이다.

그러나 영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다른 이로움이 있다.

신앙은 길이 다른 것이고,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길을 선택하면 다른 이들에게 이로운 것이 내게 해가 된다.

내가 길을 선택하면 다른 이들에게는 해로운 것이 내겐 이로움이 된다.

 

7.

오해 없이 들으라.

교회에서는 술과 담배를 금기시 한다.

그런데 자꾸 술과 담배와 싸운다.

그러니까 술 먹고 담배 먹고 하는 사람들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술과 담배가 건강에 이롭지 않을지는 몰라도 신앙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문제는 길이 다를 뿐이다.

결혼하기 전에 여러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다른 길의 이로움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불신앙이다.

 

8.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겼다.

그 순간, 지금까지의 중요한 것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바울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것들이 여전히 중요하다.

당신이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길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다.

 

9.

서두에 말한 것처럼 왜 신앙인들의 이타심이 사라지는가?

그것은 신앙을 자신의 토대위에 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것은 버리지 않고 그 위에 더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결혼의 문제로 말하자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 치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연애하던 시절은 버려야 한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지속한다면 어떻겠는가?

결국 결혼은 왜 했는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겠나?

결혼이라는 고귀한 의미가 퇴색하고 말지 않겠나?

그것과 똑같은 형태의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10.

잠깐 여러분들께 양해를 구하려고 한다.

지난 주에 집사님들 모임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다음 주 추수감사주일에 우리가 옆 교회에서 예배드리자는 제안이었다.

우리교회 옆 교회는 개척교회다.

물론 우리교회도 개척교회를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우리와 교단도 다르고, 스타일도 분명히 다르다.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성도 다를 것 같은 기운이 있다.

그런데 계속 내 마음 속에 그곳을 한번쯤은 응원을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교회도 개척을 했고, 똑같은 과정을 거쳐 왔다.

지명교회는 이렇게 장소라도 있지 우리교회는 처음에 장소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정말 가족밖에 없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한번도 집사람과 아이들만 놓고 설교한 적이 없다.

예배 때마다 함께 예배하며 응원해 주신 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주일에 10명 미만으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다.

그때, 나는 너무 큰 위로를 받았었다.

그리고 나도 기회가 된다면 개척하는 교회를 작게나마 돕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11.

그런데 막상 옆 교회에 개척교회가 들어오니 쉽지 않았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니 코가 석잖데 누굴 돕냐?”

“오지랖도 넓다...” 

“너무 이상주의 아니냐? 현실감이 없는 것은 아니냐?”

“좋은 목사인척 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니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게다가 교회에 타격은 없을지, 헌금은 어떻게 할지,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디테일한 것을 고민하게 되니 쉽게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12.

이런 오락가락의 생각 속에 기도주간을 가지며 오늘 본문을 묵상했다.

그리고 본문 속에서 바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육신에 매여 있으면 필연적으로 경쟁하게 되어 있다고,

육신에 매여 있으면 필연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고.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는 육신에 신뢰를 두지 않는 것이라고...

 

13.

추수감사주일에 우리교회는 2가지 중요한 일을 한다.

첫째는, 주일공동체예배는 개척교회에 가서 조용히 예배하며 축복한다.

우리교회서 모이는 인원보다 더 많이 가서 기도하고 축복하면 좋겠다.

일체의 임사나 예배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한 교회의 개척을 축복하고 축하하기를 원한다.

경쟁이 아닌 격려와 응원의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마음이나 불편한 마음 있으면 용서하시라.

그래도 그날은 주님의 이름으로 한 교회를 축복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자.

 

14.

둘째로는 추수감사주일 헌금은 지역 독거노인들을 위해 쓰자.

작년과 마찬가지로 지역 독거어르신 10가정을 위해 작은 도움을 드리자.

22일 주일 오후, 준비한 물품을 들고 우리가 가자.

귀한 나눔과 사랑의 인사를 드리자.

 

15.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에 매여 있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쟁하게 되어있다.

육신에 매여 있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신앙은 육신에 매인 삶을 버리고 영에 매인 삶으로 사는 것이다.

그 영에 매인 삶을 위해 바울은 4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가 정말 꿈꾸는 삶의 가치들이다.

 

16.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한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다림교육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정말 아이들의 교육에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는 점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점점 더 심해지는 성품의 문제들을 발견한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교육과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아이들 교육만으로는 안 된다. - 부모교육도 필요하지.

부모교육만으로도 안 된다. - 선생님들, 지역사회 공동체의 교육도 필요하다.

점점 더 커져가는 교육의 가장 마지막은 무엇일까?

나는 놀랍게도 “신학교육”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만약 온전한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온전한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교회가 이렇게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온전한 그리스도를 안다면 이렇게 살지는 못할 것이다.

 

17.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알자.

그분의 생각이 어디에 계신지, 그분의 시선이 어디에 계신지 알자.

그것을 알 때, 우리가 비로소 육신에 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한 두 번째는,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끝”이었다.

모든 것이 멈추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으며, 끝.났.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셨다.

육신으로는 십자가로 끝이 났지만 영으로는 시작이었다.

바로 부활로 인한 시작 말이다.

 

19.

우리가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쟁하는 이유, 이익을 추구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이대로 간다면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만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 이후의 부활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퍼주고 나누면 손해를 본다.

그러나 손해가 우리의 끝이 아니다.

손해 이후의 부활이 있다.

결국 부활을 아는 사람만이 나누고, 손해보고, 사랑할 수 있다.

 

20.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한 세 번째는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사자 굴에 들어가자면 들어가겠는가?

왜? 그 마지막이 사자 밥인 것을 알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

그러나 부활을 안다면 못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는가?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고난은 아무리 용기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동참하지 못한다.

결국 부활의 능력을 아는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21.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한 네 번째 방안,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께서 왜 죽으셨는지 아는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다.

알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고귀한 것들은 다 남을 위한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의술?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뛰어난 학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천재적 음악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22.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남에게 져 주라.

당신은 남보다 더 낮은 자리를 찾으라.

당신은 남보다 더 손해를 보라.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길이고, 사명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고난도 받고, 어려움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끝이 아니며, 고난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잊지 말라.

우리가 부활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꿈꾸시고 계획하신다.

우리는 다만 십자가를 꿈꿀 뿐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꿈꾸고, 하나님은 부활을 꿈꾸는 삶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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