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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빌립보서묵상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활동하시도록 하십시오

[빌립보서묵상07]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활동하시도록 하십시오.


빌립보서2:12~15,

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13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14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1.

지난 주과 같이 연속해서 차와 관련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네요.

며칠 전, 끔찍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신호위반을 하며 달리던 레미콘 트럭이 반대 차선의 차량을 덮쳐서 그 차량에 타고 있던 3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사고 차량의 뒷 차량에서 촬영한 듯한 영상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본 저도 문제지만 요즘 뉴스에서는 그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네요.


2.

그러나 정작 제 안에 일어난 문제는 그 장면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숨진 이들의 신원을 말하는 대목에서였죠.

그들 3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이랍니다. 

그리고 그 사고당시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답니다.

저의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혹시 천주교신자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시겠죠?

왜 좋은 일, 왜 믿는 자들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왜 착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이 며칠간 또다시 제 마음을 어렵게 하며 눈물짓게 했습니다.

 

3.

점점 사회는 빈부의 차이가 두드러져 가죠.

믿고 싶지 않지만 배운 사람들이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부리며 삽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이 없는 이들을 밟으면서 살아가죠.

사랑이나 나눔, 이해와 공평은 구조적으로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법 없이 “착하게만 살아도 되는 세상”이란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회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은 공의”를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들을 접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4.

지난 주에도 저멀리 시리아에서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시리아를 선교하던 선교사님들 11명이 IS에게 참수를 당한 겁니다.

이들 11명은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거부한 분들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마치 마지막 보루를 잃은 것처럼 마음이 아파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이런 불평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5.

저는 이번 주, 이런 불평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설교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대했습니다.

제 눈에 처음 들어온 본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빌2:14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6.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성경의 인물 중에 [요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그야말로 고난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이죠.

요셉은 어릴 적, 썩 버릇이 있었던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죽 버릇없고 싸가지가 없었으면 형제들이 그리 미워했을까요?

성경의 인물들을 좋게 보고 싶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깐족의 대명사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려가죠.

그리고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억울한 노예생활도 견디기 힘든데 억울한 누명까지 씌게 되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되레 성폭행범이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그야말로 꼬인 인생인 것이죠.


7.

그렇다면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있을까요?

만약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다면 언제 실현되어야 했을까요?

그는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팔려가려는 순간 아버지가 나타나 구출되기도 했어야 할 것이고요.

노예생활 중에 탈출하는 기적도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기적을 볼 때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랬다면 아마 성경상의 인물 요셉도 없었을 것입니다.


8.

우리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정의의 순간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죠.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의 정의가 나의 생각대로, 나의 시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는 십수년이 지난 이후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억울해하는 고난을 다 당한 이후에 말입니다.


9.

문제는 우리의 불평이 일어나는 시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에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불평합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 위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불평합니다.

불평의 출발점은 나의 생각이 옳다는데서 시작됩니다.

지난 주, 가룟유다의 이야기를 나눴었는데요.

그의 탐욕과 배신의 출발이 바로 불평에서 시작된 것이라고요.

불평하다보니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차라리 돈이나... 차라리 언제 발빼나... 생각한 것이죠.

그렇다면 왜 불평이 생겼느냐?

자신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해야 되는데...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더 똑똑한 것입니다.

그렇게 불평은 나의 똑똑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셈이죠.


10. 

누가복음 12장에는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부자는 농사를 지어 많은 농작물을 수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확한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수확한 것들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겠죠?

그래서 그는 저장소를 지어서 그 곡식을 보관했습니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상황을 만든 것이죠.

이제 그 부자는 든든했을 겁니다.

몇 해는 배를 튕기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오늘날로 말하면 한번에 쓸 수 없는 많은 돈이 생겼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저축하겠죠.

그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생명을 가져가신다면 그 많은 것들은 누구의 것이 되는냐?는 질문입니다.


11.

이 말씀에서도 주신 것은 나누라는 일관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맥락의 말씀은 다음 기회로 넘기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과연 “그 부자는 지혜로웠는가?”입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이 부자와 같은 방법을 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죠.

많은 수확을 했을 때 그것을 다른 이와 나눌 생각을 하는 이는 극히 적을 것입니다.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나의 것이죠.

그것이 세상의 진리이고, 가장 똑똑한 방법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정말 똑똑한 것 맞을까요?


12.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부분에서 섬세히 우리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가 어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그는 갈릴리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이라면 전문가이죠.

그보다 갈릴리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대목이 나오죠.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셔서 갈릴리 바다 가운데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날따라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일에 실패를 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배를 정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출항 명령을 하신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잡힌 물고기로 인해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죠.


13.

이 구절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말씀을 읽으십니까?

“와~ 예수님이 고기도 잘 잡으셔~” 이런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져~” 이런 생각요?

고기 한번 잡으신 것을 가지고 “예수님, 대단하다...” 이런 식의 성경해석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고기 몇 마리 더 잡는 초능력으로 증명되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다른 차원에서 한번 이 구절을 보세요.

베드로는 물고기와 갈릴리바다 전문가입니다.

그가 오늘 틀렸다면 틀린 것이고요, 틀림없다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감과 경험의 지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어요.

전 이 말씀에서 나의 경험과 전문성보다 주님이 먼저시라는 것을 배웁니다.


14.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포기도 빠릅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도전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척 보면 견적이 나오기 때문이죠.

많이 아는 사람은 계획도 잘 세우지만 섣불리 판단합니다.

따라서 불평과 시기도 빠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세는 알지 몰라도 무모한 십자가는 모릅니다.


15.

결혼 초에, 집사람과 식당엘 갔더랬습니다.

앉았는데 일하시는 분이 물그릇을 던지듯 놓습니다.

마치 귀찮은 듯 일을 합니다.

저는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집사람을 보니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제가 기분 나쁘다고 했더니 집사람이 말을 합니다.

“바쁘셔서 그런거지...”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 나는 기분이 나쁘고 집사람은 괜찮습니다.

저는 그게 더 기분 나쁩니다.

그때는 제가 더 똑똑한 줄 알았어요.

나는 그런 세밀한 것이 보이는데 집사람은 못 보는 줄 알았어요.

권리를 찾을 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늘 불평이 많았어요.


16.

여러분 아세요?

작은 생활의 불평이 하나님을 향한 불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내 삶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께 향한 불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은 나의 경험, 나의 지식, 나의 똑똑함은 쓰지 않으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거듭나지 않은 지식을 쓰지 않으시는 것이죠.

사랑이 없는 비판을 쓰지 않으십니다.

긍휼이 없는 지적을 쓰지 않으시죠.

이해가 없는 반대를 쓰지 않으십니다.

공감이 없는 주장을 쓰지 않으셔요.


17.

최근 한국사회는 현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 문창극총리로 비롯된 하나님의 뜻 논쟁, 노동문제, 그리고 역사교과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신앙고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념이 갈리고, 서로 니편 내편이 되어가는 형국입니다.

저는 그리 똑똑하지 못해서 이런 현안에 대해 옳고 그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건 공감 없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만은 압니다.

아무리 살인자여도 그 가족이 겪는 아픔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거든요.

우리도 그 죄인이었고, 또 죄인들을 위해 사역하는 이들이기 때문이죠.

여기에 나의 똑똑함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평의 시작이죠.

   

18.

나의 똑똑함과 전문성이 앞서면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다 마음에 안 들잖아요.

내가 더 잘한다고 생각하면 다른 이들이 하는 것에 불만 있잖아요.

먼저 주님의 기초를 세우셔야 합니다.

내 똑똑함이 내 안에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운행하시도록 말이죠.


19.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과 에덴동산 밖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에덴동산과 밖이 달랐던 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해가 뜨지 않거나 식물들이 마른 상황이 아니죠.

달랐던 점은 하나님이 운행하시느냐 아니냐의 차이였습니다.

에덴동산은 그분의 운행하심이 있으셨어요.


20.

쉽게 설명해 볼까요?

여러분이 충분히 쉬고, 체력도 비축되어 있어요.

아마 그러면 하루쯤 운동을 하는 것은 거뜬하겠죠?

운동의 영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피곤하고 힘들고 감기도 걸리고 발목도 아파요.

여러분은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겠죠.

이런 차이라는 것입니다.


21.

맘이 편하고 즐거운 상태일 때는 누가 못생겼다 이야기해도 기분 안 나쁘죠?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 좋게 들리고, 이해심도 많아지죠?

반면, 그렇지 않으면 어떤 말을 해도 오해하고 꼬아서 듣죠.

이런 차이예요.

에덴동산은 전자의 경우고 그 밖은 후자의 경우라는 것이죠.


22.

저는 주일예배를 준비하는 것은 토요일부터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요?

일찍 자요.

주일을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지 못하면 주일에 피곤하고 힘들고 어렵습니다.

육체적인 피로만 그럴까요?

생각과 감정도 그렇습니다.

토요일오후부터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조심하고요.

감정이 상하는 일이나 문제들을 경계하죠.

참 이상하게도 토요일 오후나 주일 오전에 싸움이 많아지죠?

아내와 주일 오전에 싸우죠?

그러면 주님이 운행하시도록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23.

13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활동하신데요.

어떻게 활동하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실천할까?를 고민하게 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되려면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고민해야 합니다.

아무리 원수여도 미워하고 정죄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무리 나와 상관없어도 소외되고 가난한 이를 무시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아무리 내 것이어도 나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그런데 이런 마음이 간단해요?

간단하지 않죠?

그런 마음이 그냥 흐르는 곳이 에덴동산이었다구요.

지금 이 땅은요?

그런 마음이 흐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죠.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도록 말이죠.


24.

어떻게 노력하느냐가 문제겠죠?

주일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다시해보죠.

자신이 기분을 다 상하게 해 놓고, 주일에 와서는 설교 탓하죠.

자신이 스스로 피곤케 만들어놓고는 주일에 와서 졸면서 분위기 안좋다하죠.

자신이 하나님이 운행하시도록 자신을 만들지 않고서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볼 수가 없어요.


25.

계3: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6.

내가 문을 열어야죠.

노력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견디고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죠.

나와 생각이 달라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경우를 당하여도,

많은 어려움과 방해가 찾아와도,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죠.

열어야 하나님이 들어오시고요.

여러분이 하나님이 운행하시도록 자신을 만들어야 하나님 활동하십니다.

집사회에서 태화복지관 체육관을 빌렸습니다.

이렇게 체육관을 만들어 놔야 우리가 운동할 수 있죠.

여기서는 운동 못하지 않습니까?

결국 믿음은, 신앙은 주님이 내 안에 운행하시도록 나를 만드는 작업이예요.

마음을 넓히세요.

여유를 만드세요.

당신의 마음에 주님이 활동하신 공간을 만드세요.

넓게 생각하고, 여유있게 바라보고, 큰 마음을 가지세요.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하세요.

그 사랑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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