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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빌립보서묵상

현실에 살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사십시오

[빌립보서묵상09] 현실에 살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사십시오.


빌립보서3:1~3,

1    끝으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 나에게는 번거롭지도 않고, 여러분에게는 안전합니다.

2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3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1.

오늘날 교회는 위기를 겪고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말한다.

매년 통계적으로 전체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줄고 있다.

지난번, 또래멘토링 워크샵에서 고등학생 30명 가운데 교인은 하나였다.

청소년뿐 아니라 주일학교는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만한 상태다.

70년대 한국교회는 주일학교 부흥기였다.

그때만 해도 한국교회 메시지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그 여파로 80년대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런데 양적팽창과 대형화는 교회중심을 사람에서 능력중심으로 바꿔버렸다.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미래세대에 대한 투자는 건물로 바뀌었고,

주일학교 및 교육에 관한 부분은 전체 관심도의 10%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여파가 현재 교회의 위기로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2.

가나안성도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가나안성도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성도를 말하는 신조어다.

가나안을 거꾸로하면 [안나가]인 것에서 만들어진 단어다.


3.

그러나 단지 숫자가 줄었다는 것으로 위기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진짜 위기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위기는 핵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불을 밝히는 초가 불은 꺼진 채 앙상한 초만 남은 격이다.

초의 핵심은 뭔가?

바로 초가 타서 불을 밝히는 것이 핵심 아닌가?

그런데 마치 쇼윈도의 장식품처럼 화려한 색상의 초들이 진열된 느낌이다.


4.

요즘 역사교과서문제을 보면 암울하기 그지없다.

마치 70년대 사회현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70년대를 살아온 분들의 사회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70년대는 답이 하나였다.

주관식 문제라는 것이 없었다.

4가지 중에 답이 있었고, 그 중의 답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양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고,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터부 당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5.

개그맨 김제동씨가 들려준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사자성어 문제를 냈단다.

“밤중에 술 먹고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릴치는 행위” - (고성방)가

“아빠인가?”

실제 문제였단다.

얼음이 녹으면 ( 물 ) 된다.

“얼음이 녹으면 (북극곰이 울게) 된다.

그런데 그 문제가 틀렸다... -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틀렸는가?


6.

창의력 중시 사회다.

얼마나 중시되면 경제도 창조경제이겠는가?

그런데 창의력이란 무한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정해진 룰, 이미 알고 있는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 상상력이다.

당신의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는가?

바로 그 상상력이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생각한다.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사라지면 믿음도 사라진다.

왜 이 땅의 권세자들은 획일적 백성을 만들려고 하는가?

왜 이 땅의 독재자들은 정답이 하나뿐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가?

왜 이 땅의 거짓 선지자들은 용서 없는 하나님을 만들려고 하는가?

모두가 다 다양한 창의와 상상을 지우려고 그런 것이다.

바로 우리게 있는 창의와 상상력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7.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디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편139:7~9,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 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어떤 곳에 거해도 거기 하나님 계시다.

하나님은 무소불위하신 분이시다.

내가 비록 답이 틀렸어도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시다.


8.

다윗의 또 다른 시편인 시편23편을 보라.

시23: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답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어떤 이는 아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어떤 이는 고통 속에서 주님을 경험한다.

어떤 이는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났다가 그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언제나 동일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

우리는 어떤 모습에서 하나님을 만날지 알지 못한다.

신앙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다.

우리의 삶이 다 다르듯 하나님의 역사도 다 다르게 임한다.


9.

역사의 문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특별히 그 해석에는 현실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옛날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무시가 제아무리 당시의 관습이었던들 오늘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자명하듯이...

일부다처제가 통속이었던들 오늘날 수용될 수 없듯이...

해석의 문제는 우리의 현재 삶과 직결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해석의 문제는 다양하다.


10.

성경을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러 다양한 방법론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바라본다.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4가지의 관점, 즉 공관복음서가 있듯이 해석은 다양한 관점을 내포한다.

각 교리와 교단들이 이런 다양함에서 존재한다.

나는 교단과 교리의 해석에는 문제점을 느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교단이 너무 많다고 힐난하지만 나는 그리 느끼지 않는다.

어떤 수학문제를 푸는데도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지 않는가?

이 학원과 저 학원의 학습방법론이 다르지 않는가?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양함에는 죄가 없다 느낀다.


11.

문제는 그 다양이냐 단일이냐가 아니다.

다양이든 단일이든 그것이 어디에 기초를 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오해마시라.

수학학원이 심지어 틀린 답을 내놓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수학학원이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이다.

자신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가르치는 아이를 위해서인가?

만약 아이를 위해서 존재하다가 답이 틀렸다면 분명 실수다.

그 실수는 돌이킬 수 있는 실수다.

우리는 잘하려다가 실수할 때가 분명 있다.

우리는 잘하려다가 잘못 가는 경우가 분명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실수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다르다.

답이 틀렸다고 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아예 틀린 답을 알면서도 맞다고 우긴다.

그것이 핵심과 본질을 잃은 더러운 모습이다.


12.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다.

요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다양한 관점의 기초이기 때문에 하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어떻게 바라봐도 괜찮다.

다만 그 관점의 기초가 “사랑”인가에 핵심이 있다.


13.

오늘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악한 일꾼들을 경계하라고 한다.

그들은 할례를 받는 것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한마디로 획일화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치 맹목적인 신앙만을 강조한다.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된다고 말한다.

성경만 읽고 외우고 외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은 형식이 아니라 행동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믿음이다.

형식적 신앙은 의심을 안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

의심이 죄가 아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죄다.


14.

바울은 우리에게 3가지 신앙적 핵심을 제시한다.

빌3:3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요한복음4장에서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다.

이 본문에서 예배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라튜레우온테스”다.

이 단어는 “라튜레우오”에서 온 단어인데 뜻은 “봉사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개역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성령으로 봉사하며”라고 적고 있다.


15.

이 단어의 뜻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좋겠다.

유대인들에게는 종으로 7년째 되는 해에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제도가 있다.

그러나 종이 주인과 떨어지지 않으려하면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는다.

다른 말로 말해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은 이제 삯을 위해 종노릇을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라튜레우오”다.


16.

올바른 신앙인이 되려면 기억하라.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서 대가를 찾지 말라

어떤 대가를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주님의 축복을 맞바꾸지 말라.

하나님은 자발적이고, 삯과는 관계없는 예배를 원하신다.

그것이 영적인 예배다.


17.

두 번째 신앙적 핵심을 읽어보라. 

빌3:3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18. 

악한 일꾼들은 보통 자신의 행위를 자랑한다.

그것을 우리는 현대말로 스펙이라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일을 했으며, 얼마나 잘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그렇다.

신앙적 스펙이 있다.

내가 얼마나 오랜기간 신앙생활을 했으며,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고,

봉사와 헌신의 일들을 해왔는지를 자랑한다.

보통 그런 자랑들을 우리는 직분과 바꾼다.


19.

그러나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나”가 아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고 한다.

여기서도 해석이 필요한가?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당신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가?

당신은 병자를 고치신 그리스도를 자랑할 것인가?

당신은 풍랑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는가?

어떤 이는 그의 리더십, 언변, 심지어는 학식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정령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가?

바로 십자가 아닌가?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십자가...


20.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갈6: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21.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십자가를 기뻐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은 어떤가?

“너 앞에 놓인 교수대를 기뻐하라”

“너 앞에 놓인 처형장을 기뻐하라”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틀 중의 하나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셨다.

자발적인 발걸음으로...


22.

혹시 우리는 그 길을 피하려고 예수 믿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우리는 십자가보다 그 이후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구절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There is not a Crown without a Cross.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십자가의 신학은 없고, 십자가를 이용한 왕관의 신학만 있는 것이다.


23.

올바른 신앙인이 되려면 기억하라.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다. 십자가를 자랑하라


24.

마지막 신앙적 핵심을 읽어보라. 

빌3:3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우리들이야말로, 참으로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25.

내가 존경하는 분 가운데 김준엽이라는 분이 있다.

일본 유학시절, 나라를 위해 학업을 내려놓고 독립군이 되었던,

해방이후, 교육자가 되기 위해 유학을 마치고 최연소 대학교수가 되었고,

학생들을 위해 총장의 자리를 내놓았던 분이다.

그분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큰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정의와 진리와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26.

우리가 정의와 진리,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피곤함, 두려움과 괴로움 때문에 우리는 정의를 외치지 못한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우리는 귀찮아서 행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육신의 안락함, 편안함이 최우선이 되어 버렸다.

정의보다 내 주머니가 더 중요하고, 진리보다는 내 기득권이 더 중요하다.


27.

올바른 신앙인이 되려면 기억하라. 

내 육신의 안락함을 의지하지 말고 정의와 진리를 위해 수고를 다하라.


28.

아픈 자들 곁에 가라.

시간 날 때마다 봉사하고 수고를 다하라.

당신의 겉 사람은 피곤하고 힘들는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라.

우리의 위기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당신은 영적으로 위험해질 것이다.

예배의 자리를 찾고, 수고와 헌신을 할 자리를 찾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영적인 힘을 넣어줄 기회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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