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7. 09:19ㆍ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어릴 적, 저는 무척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 어린이들은 어른에 비해 제약이 많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고, 가지 말아야 할 길도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많이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허락된 것들도 많아 보였고,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어린아이의 눈으로 말이죠.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 생각했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어른이 되면 시험도 보지 않겠죠.^^ 얽매고 있는 규율과 울타리, 강제적인 따름과 싸워야 하는 어린 시절을 벗어나, 어른이 되면, 내게 자유와 해방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또 다른 규율과 울타리, 새로운 문제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는데, 어른이 되니 내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정하는 것이, 듣고 따르는 일보다 수 백 배는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로 사는 것보다, 아버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공부하는 시절이 힘들어, 언제쯤 공부 안 하게 될까를 세어보았지만, 가족의 생계를 고민하는 나이가 되어서는 차라리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던 시절이 더 편안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몫이, 아들은 아들의 몫이 있듯이, 우리의 처지에 따라 각각 다른 상황이 주어집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상황이 바뀐다고 멈춰지지 않습니다. 각각의 자리에서, 각각의 싸움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가나안에서 싸움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광야의 훈련은, 가나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싸움을 잘 싸우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기간입니다. 어린 시절 준비를 잘하면 커서 보다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어린 시절 공부를 잘했다고 커서는 아무 일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서도 훈련이 있고, 가나안에서도 훈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내면의 문제와 싸워야 했고, 가치관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과의 관계성을 주문하셨습니다. 광야는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이고, 순종과 믿음에 대해 기초 돌을 놓는 시간입니다. 그에 비해 가나안은 오랜 이 땅의 전통과 싸워야 하고, 관습과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많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잃지 말아야 하고, 세상에 뿌리를 두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싸움인지, 아닌지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각각에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38에는 광야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교회는 광야의 생활과 같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내면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에서 믿음을 키워야 하고,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광야가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그곳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곳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가나안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가 가나안과 같은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와 권세를 선포할 수 있도록 돕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나 이 땅에 뿌려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행 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교회와 같았던 예수님과의 시간을 뒤로하고, 이 땅에 뿌려졌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세상의 권세들과 싸웠습니다. 세상의 관습과 논리, 철학과 사상에 무모한 대응을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듯, 교회를 지나 삶의 자리에 믿음을 뿌리고 개간을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주님의 기적과 섭리가 넘치는 광야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사단의 뜻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가나안에서의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일지라도 그 교인들이 세상에 뿌려지지 않으면, 세상을 개간하고 변혁시키지 않으면, 광야교회를 떠나 가나안의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뜻보다 악한 영의 뜻에 더 가까운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죽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에 뿌려져 썩어져 가는 밀알의 인생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사명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사역이 사명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광야를 넘어 가나안까지 가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듯, 우리는 교회를 지나 세상에 뿌려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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