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4. 14:24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8:4~8 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각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치지 않는 자의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주님 말씀으로 나를 깨우는 시간 되시길 빕니다.
지난주 들어서 우리는 누가복음 8장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매일 묵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했죠. 물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입을 통해 우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정황들을 통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열두 제자와 동등하게 여자 제자들과의 동행을 통해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없는 나라를 몸소 보여주셨죠.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표증, 그러니까 사람답게 사는 것,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 우리를 사랑하사 끝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 그 사랑보다 더 귀한 표증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죠. 오직 그 사랑 안에서만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미 매일 묵상으로 나눈 이야기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오늘의 본문을 묵상해야 하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죠. 4가지 종류의 땅에 씨를 뿌리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여러분께 질문 하나 하고 말씀을 이어가죠. 이 비유의 말씀에서 여러분은 어떤 메시지를 들으시나요? 이 비유의 의미를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번쯤은 이 구절을 읽어 보셨을 거예요. 여러분이 이 비유를 처음 들으셨을 때 느낀 느낌은 어떠셨나요?
성경을 읽을 때 보면 성경의 이야기별로 구분하고 그 부분의 소제목을 달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번역이 잘 된 한글 성경이 새 번역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새 번역을 공식 성경을 쓰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개역 개정본을 보죠. 그 개역 개정본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소제목이 이렇게 달려 있습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어쩌면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는 것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목을 단 이유가 있죠. 그것은 오늘 본문 이후 너무나 상세하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히 공관복음서 모두 다 똑같죠. 그 설명이 바로 4가지 종류의 마음 밭을 가진 이들에게 말씀이 뿌려질 때 어떤 결과를 내는지에 대한 것이죠. 길가에 떨어진 말씀은 악마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돌짝밭은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가시덤불은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직 좋은 땅이어야 열매 맺는다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아주 적절하죠. 그래서 우리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런데 새 번역 성경에 보면 거기도 소제목이 달려 있는데 소제목이 조금 다릅니다. 혹시 새 번역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한번 읽어보시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사뭇 의미가 다르죠? 개역 개정본에서는 땅에 관심을 두지만 새 번역은 씨 뿌리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비유는 길가나 돌짝 밭, 혹은 가시덤불이나 옥토가 아니라 씨 뿌리는 자를 주인공으로 제목을 붙였을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 신학자들의 대부분은 이 보충 설명에 대해 의도를 의심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비유의 설명 편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초대교회의 첨가라는 데에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이죠. 성서 해석학자들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는 이렇게까지 부연 설명을 첨부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삼습니다. 아마도 당시 초대교회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이 비유가 설명된 것으로 보는 것이죠. 이런 견해에 혹시 낙심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말씀에 오류가 있거나 의도가 첨가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실지도 모르지만, 이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행적과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 역사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못 보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일지도 몰라요. 오늘 읽은 본문은 누가 뭐래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편협되거나 혹은 정해진 해석을 넘어 주님의 의도와 뜻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죠.
만약 이 비유의 설명 부분,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다음에 등장하는 본문이 초대교회의 첨언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것은 아마도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 의심하는 이들을 향한 많은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4가지 밭에 대한 의미로 해석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밭에 속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들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여요. 그런 의도는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서 이 말씀이 4가지 밭에 대한 말씀으로 많이 해석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해석을 넘어 우리는 예수님의 본래 의도,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중심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를 찾고자 합니다. 오늘 그 말씀을 찾는 것이 여러분과 나누는 말씀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많은 이적을 베푸시고 많은 사역을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것이라 여러분은 생각하시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도 사역에 실패하고 낙심될 상황이 많았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예수님은 실패가 없으시고, 말씀하시면 다 사람들이 알아먹고, 깨닫고 했을 것이라 믿고 싶으시겠지만, 꼭 그러신 것은 아니었어요. 가령,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제대로 이적을 베푸시지 못하셨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신 거죠. 인간적인 언어를 동원한다면 한마디로 사역에 실패하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에 또 놀라셨죠.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기적 없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대적자들이 주위에 들끓었죠. 대적은 바리새인들만이 아니었어요. 따르던 이들 가운데서도 이탈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운데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이 또한 요한복음서 6장에 등장하죠. 일일이 읽지 않지만 찾아보세요. 예수님이라고 모든 것이 다 잘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실패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았어요.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지고 잘못되면 모두 실패자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사람들이 주위에서 떠나고, 능력이 더 이상 드러나지 않고, 놀라운 성과를 내지 않으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어야 하고, 뿌린 만큼 거두어야 한다고 믿죠. 그러지 못하면 모두 실패로 보려 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 익숙하시죠? 잘 기억해 두세요. 이 말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지, 뿌린 만큼 거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뿌린 대로’와 ‘뿌린 만큼’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뿌린 대로’는 내가 사과씨를 뿌리면 사과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죠. 반면 ‘뿌린 만큼’은 내가 사과씨 10개를 뿌리면 10개의 나무가 자라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다르죠.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혼동해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로 착각하죠.
정말 우리는 뿌린 만큼 거두어야 합니까?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결과가 드러나야 합니까? 내가 뿌렸으면 뿌린 만큼 거둬야 합니까? 그런데 성경은 ‘뿌린 만큼’ 거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지, 뿌린 만큼 거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종류의 문제고 다른 하나는 분량의 문제입니다. 헌신이란, 뿌렸으나 뿌린 만큼 거두지 않아도 계속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모든 헌신에는 뿌린 대로 거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많은 노력을 하셨지만 뜻대로 다 이루시지는 못했습니다. 노력이 헛되어 보이고, 실패처럼 보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3년간의 제자 훈련은 무의미해 보였고, 수제자라는 자는 대놓고 스승을 욕합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실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달리 예수님은 그런 실패에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실패 감정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래도 기쁨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제자가 배반해도 미소를 잃지 않으셨고, 신뢰를 등지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다 떠나면 거절감에 사로잡혀 낙심하는 우리의 눈과는 달리 예수님은 확신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하나님이 훨씬 크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본문은 이런 맥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그 씨가 길가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하죠. 아침부터 애를 썼지만 그 애씀이 무색하리만큼 아무런 결과가 나지 않아요. 그때 우리는 낙심하게 되죠. 저도 낙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제게 하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낙심에 사로잡혀 헤맬 때 주님의 음성처럼 들리는 말이 있었어요.
“네가 마음 먹는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해? 그럼 너가 하나님이지 사람이야?”
씨를 뿌리지만 씨가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뿌리는 거예요. 내가 하면 뭐든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교만 중에 가장 큰 교만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다 되어야 하고, 내가 예배하면 다 들어져야 하는 것만큼 큰 교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보다도 크시고, 우리의 예배보다도 크십니다. 하나님은 상황의 문제보다도 크시고, 우리의 믿음보다도 크십니다. 그래서 실패가 있어도, 어려움이 있어도, 아픔이 있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경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셨지만 인간이 쓴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도 읽어야 합니다. 그 오류 가운데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오류를 뛰어넘어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실패하신 것처럼 보이고, 하는 일이 다 잘 되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잘되지 않으실 때도 있고, 사람들을 이해시키지 못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확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럼에도 꿋꿋이 사역하셨어요. 그것이 그분의 사역이었기 때문이고,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감사한 게 있어요. 어릴 적에 아버지께 책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에 호기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 책들을 다 읽었습니다. 그때가 중학생 때였는데 책이 대부분 고전, 에세이, 철학책 들이었어요. 중학생에게는 어려웠죠.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책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는지 책장에 있는 책은 다 읽겠다 마음먹고 읽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게 생각나더라고요. 쓸데없이 시간만 보내고 폼만 재던 것 같았는데 나중에 책을 읽을 때는 이해가 빠르고 구도가 보이는 거 있죠. 성경도 그래요. 한번 두번 읽을 때는 잘 몰라요. 교회에서 억지로 읽으라고 통독도 하고 했는데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나니까 그때 그 말씀이 그런 말씀이었구나! 그때야 이해가 가더라고요.
글을 읽으면 꼭 이해가 가야 하나요? 그렇지 않으면 못 읽어요? 그래서 우리는 책을 못 보는 거죠. 이해가 가지 않아도 책은 계속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생각에 이해의 길이 다져지기 때문이죠. 지금 이해가 안 된다고 멈추면 이해의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멈추면 영영 열매와 거리가 멀어지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매를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죠. 계속 뿌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어요.
고린도전서 3:6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심고 물주고 뿌리는 일은 우리의 일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고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그 열매에 따라 우리는 일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심고, 물주고, 씨를 뿌릴 뿐이죠.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행하는 자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죠? 우리의 신앙은 고저의 파고를 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 정말 나에게 있기나 한 건지…. 어떤 때는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이 필요나 한 건지…. 어떤 때는 믿음의 동지들에게 시험당할 때도 있죠.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하고, 그래도 우리는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씨 뿌리는 사람의 태도, 즉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뿌려야 한다고요. 성과가 없어도, 마치 길가에 떨어져 썩어버리는 것 같이 쓸모없어 보여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치 주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인 우리를 위해서 꿋꿋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치지 않는 자의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지치지 않는 자의 몫이고, 은혜와 축복은 그렇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씨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임해요. 눈물을 흘려도, 아픔이 있어도, 고통과 방해가 넘쳐도 지치지 않고 행하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집니다. 끝까지 선한 청지기의 마음으로 뿌리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니 뿌렸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뿌렸지만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뿌린 것으로 우리는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저 지치지 않고 뿌리는 자입니다. 거두시는 것은 주님께 맡기자고요. 뿌리는 것에 기쁨을 얻는 자, 뿌리고 행하는 것에 소망을 두는 자, 그들이 하늘나라를 얻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우리 모두 함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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