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 8:2~3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행복한 금요일 아침이에요. 날씨는 쌀쌀하지만 감사와 기대로 시작하는 여러분의 가슴은 따스할 줄 믿습니다. 오늘도 밝은 미소로 이 아침을 시작하시길 빕니다.
누가복음서 8장의 시작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여러 지방을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확한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누가는 이를 색다르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함께 여제자들의 이름을 등장시키는 것이었죠. 이미 우리는, 여인을 제자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당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이는 소외와 차별을 철폐하는 놀라운 행동이었음을 묵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그 무엇보다 적확하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들이 누구인지 궁금하죠. 어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잠시 언급했는데요. 오늘은 다른 여인들의 이름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고자 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설명이 있는 요안나에 비해 수산나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 이외에는 그 이름이 성경에 등장하지 않죠. 그래서 수산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아는 바 없어 설명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안나는 다르죠.
그의 남편이 헤롯의 청지기였다고 하는데, 일단 여기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갈릴리와 베레아지역을 통치했던 분봉왕이었죠. 무엇보다도 세례요한을 사형에 처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구사는 그의 청지기였다고 하죠. 청지기라는 직책도 설명이 필요한데요. 우리말로 청지기는 관리자, 집사 정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말 청지기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가 2개로 나뉘죠. 주로 등장하는 헬라어는 [오이코노모스]입니다. 이것은 '종'에 가까운 청지기예요. 또 다른 단어는 [에피트로포스]로, 이 단어는 주로 관료를 뜻할 때 사용되죠. 그러니까 행정관이나 혹은 후견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의 청지기는 바로 이 [에피트로포스]라는 단어죠. 아마도 구사는 왕의 재정을 담당한 관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꽤나 높은 직책의 사람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요안나 또한 신분이 높았겠죠? 당시에는 신분이 높을수록 여성의 운신의 폭이 좁았습니다. 귀족출신일수록 정숙한 여인이라는 족쇄가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저작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겠죠. 더욱이 외간 남자들과 어울리기는 더욱 어려웠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요안나가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본문을 읽을 때 그런 의문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저는 좀 삐딱해서인지 그런 의문부터 들더라고요. 이를 좋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뭐든 해답은 질문에서부터이기 때문이죠.
이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문득 떠오른 성경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요한복음서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가셨을 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가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혼인잔치가 벌어진 장소죠. 이 왕의 신하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다급하게 예수를 찾았죠. 왜냐하면 그의 아들이 죽을 고비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한복음서 4:5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렇게 믿고 돌아가는 도중 그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예수를 믿었다고 말하며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리죠.
저는 이 왕의 신하가 구사일 것이라는 확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연성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그런 일이 구사의 집안에 일어났다면 요안나 또한 예수의 제자로 활동할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수산나를 비롯한 여러 다른 이들도 각자의 은혜와 복을 경험한 후 주님께 헌신한 이들일지도 몰라요.
여기서 저는 한 가지 메시지를 듣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시죠. 그래서 남녀의 차별, 높고 낮음의 경계를 허무십니다. 그의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여인들을 향한 차별의 족쇄를 푸시죠.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요한복음서 4장의 이야기처럼 귀족 중에 하나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은혜를 받고, 기적을 경험했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제는 그들이 자신만의 세계, 그러니까 귀족의 세계, 자신만의 경험의 세계, 전통적인 관습과 차별의 세계를 깨고 스스로 내려와 이웃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사랑을 나눌 때 그 은혜와 기적은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요안나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자신이 귀족이어서, 출신이 달라서, 혹은 자신들이 쌓은 명성에 먹칠을 할까 봐 주저하고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고도 자신이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은 그저 우연이었겠지' '어쩌다 잘된 케이스일 거야' 한다면,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거룩하신 은혜를 선포하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예수께서 차별의 굴레를 깨뜨리듯이 우리도 우리의 묶인 족쇄를 풀어야 합니다. 케케묵은 생각을 버려야 하고, 부정에 찌든 버릇을 깨뜨려야 하죠. 그렇게 당당히 나의 자리를 박차고 주님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만의 곡간을 부수고 함께 나누는 용기가 있어야 해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모든 제자들이 도망간 그 자리에, 가장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를 요안나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의 헌신은 주님의 은혜를 불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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