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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64 - 악한 데는 조금만 더 미련해 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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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8:2~3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주와 사뭇 다른 날씨지만 그래도 맑고 화사함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오늘도 행복한 마음으로 출발하는 우리 모두에게 자연과 세계는 화사하고 밝은 기분을 선물해 줄 것을 믿습니다.

 

8장에 들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누가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지는 않죠. 그런데 그의 주변 행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말만으로 전해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삶을 통해 전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죠.

 

어제 우리는 열두 제자와 함께 등장하는 또 다른 제자 그룹에 대해 나눴습니다. 그들이 여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상에 비쳐 놀라움을 준다고 했죠. 오늘 그 여자들이 어떤 인물들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죠. 먼저 그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악령과 질병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데요. 질병은 그런대로 이해가 가죠.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하면 뭔가 큰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굳이 설명에 이런 부가적 첨언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죠. 이는 주로 막달라 출신 마리아를 빗대어 소개하는 것으로 보이죠. 왜냐하면 그녀는 일곱 귀신의 괴롭힘에 고생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수께서 고쳐주심으로 그녀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죠.

 

오늘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오해를 통해 편견과 차별의 굴레를 깨야 하는 숙제를 묵상한 바 있죠. 막달라 마리아에서 막달라는 이름이 아니라 지명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출신 마리아라는 뜻이죠. 마리아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막달라가 어느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최근까지도 학자들이 찾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갈릴리 동쪽 가버나움과 티베리우스 사이에 있는 미그달이라는 지역이 옛 막달라일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최근 2009년 그 미그달에서 약 2~3Km 떨어진 갈릴리 해변에서 옛 막달레나 지역의 터가 발굴되면서 막달라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죠.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늘 일곱 귀신이라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선입견이라고 하죠? 오늘 소개에서도 일단 일곱 귀신이야기가 먼저 따라옵니다. 과거의 일인데 마치 이마에 새긴 주홍글씨처럼 그녀의 이름 앞에 늘 붙어 있죠. 이래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오해합니다. 그렇다면 일곱 귀신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마리아에게 일곱 귀신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일곱 귀신은 성경의 또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서죠. 내용은 이렇습니다. 악한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와 다른 좋은 곳을 찾다가 찾지를 못하자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죠. 그런데 가보니 이전의 사람이 말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살기 좋게 말이죠. 그런데 그곳이 그냥 비어있었어요. 주인이 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일곱 귀신까지 데리고 그곳에 들어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아무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도 그곳에 주인이 없으면 다른 것들이 주인 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유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표증을 보여달라고 말하죠. 아마도 이 표증이라는 것이 예수께서 신성하시다는 증거로 기적을 보여달라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초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 뭐 그런 뜻이었던 거죠.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서 12:39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예언자 요나의 표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는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고 그들을 구원받게 했던 그 이야기를 뜻하죠. 이 요나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구원하신 주님의 구원 사건을 말이죠. 예수님은 이 표증밖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역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 다음으로 일곱 귀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간단히 해석하면 내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증으로 채우고, 감사와 은혜로 주님을 주인 삼지 않으면 너희 마음에는 너희가 원하지 않아도 악하고 강한 일곱 귀신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곱 귀신의 정체를 알게 되죠. 그것은 눈에 보이는 표증, 손에 잡히는 물질, 가시적인 인정 등의 말초적인 증거들을 원하는 우리의 욕심이죠.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총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느 여인보다 재능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녀에게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는 여자가 명예나 권력으로 성공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나 재물은 가능했을 수도 있죠. 그래서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미에는 '자기들의 재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돈이 있었다는 거죠. 종합하자면 그녀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무슨 정신병이나 소위 미쳤다는 의미보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오늘은 좀 어렵고 길었죠?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돈 벌기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우리는 명예나 권력을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사람답기 위해 사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 돈도 필요하고 사람답기 위해 지위도 필요하죠. 그러나 결코 그것이 주인이 될 수는 없어요. 제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달장애나 정신지체 장애우가 암에 걸린 학계 보고가 하나도 없다고요. 신기하죠? 그 말을 듣고 제가 느낀 것은 우리가 질병에 시달리는 이유는 너무 똑똑해서구나 싶더라고요. 발달장애나 정신지체자가 똑똑하지 않다는 말씀은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등바등 다른 표증을 찾으며, 그것이 똑똑한 것인줄 알고 애쓰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거죠.

 

조금만 곁가지들을 털어 내세요. 조금만 더 불필요한 것들은 잘라내세요. 악한 데는 조금만 더 미련해 지시고요. 선한 데에 조금 더 지혜로워지세요. 그러면 나의 재능은 주님께 온전히 쓰임 받을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의 총명이 주님의 제자로 쓰임 받은 것처럼 말이죠.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그곳에 주님으로 채웁니다. 자신이 바라던 표증을 버리고 십자가의 표증을 세우죠. 다른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가치 삼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오히려 주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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