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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131 - 나의 모든 것이 사랑의 열매이길 빕니다.

고린도전서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다른 형제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가라고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지금, 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면 갈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일 날이 뜨겁습니다. 물도 많이 드셔서 수분 유지를 잘하시고 온도조절도 잘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덥다고 찬 음식, 찬 에어컨 공기 너무 좋아하지 마시고 더울 땐 더울 이유가, 추울 땐 추울 이유가 있으니 잘 적응하고 대응하는 몸을 만드시길 빕니다.

 

디모데에 대한 당부에 이어 오늘은 아볼로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바울입니다. 아볼로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언급은 이미 고린도전서 1장에 바울이 기록한 바 있죠. 고린도 교회에서는 분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갈라진 분파에 아볼로의 이름이 있죠. 어떤 분파의 대표 격이라면 그만큼 고린도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의 제자 출신도, 또한 예수님을 직접 본 유대 지역 출신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인물이죠. 이집트 북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 시절 점령되어서 로마의 제2 도시로 성장했을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헬라 문화를 꽃피운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한 도시였죠. 또한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디옥과 함께 중세 기독교의 5대 중심 교구 가운데 한 곳으로 지정될 정도로 기독교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죠.

 

아볼로는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태어난 유대인 교포가 아닐까 생각되죠. 그리고 유대 전통 학문을 기초로 학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세례 요한의 연구자로 메시아에 대한 연구를 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알게 된 이후, 그리스도인으로 웅변가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언변과 학식은 당시 초대교회에 큰 영향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죠.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서는 추앙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지금 언급하는 의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분파로 서로 싸우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일종의 경고인지도 모르죠.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 소통이 되는 사이임을 보여주는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소통이 아니라 서로 권면하고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바울의 의도보다 더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볼로의 태도죠. 아볼로는 바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죠. 시간이 없었는지, 아니면 마음이 없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가 가지 않은 이유 중에, '지금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직은 적절한 때가 아니고,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님을 알 수 있죠. 어쩌면 고린도 교회에 영향력이 큰 아볼로가 가서 고린도의 분란을 가라앉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볼로는 다른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가지 않았을까요?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득 스치는 생각은 있어요. 어쩌면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현실을 아볼로가 알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 또 다른 현실이란 그들의 분란 가운데는 진짜 그리스도여서, 진짜 게바를 응원해서, 진짜 바울과 아볼로의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입니다. 그저 그들이 말하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은 그들이 앞세우는 이름에 불과하고 정작 그들은 그들만의 다른 철학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아볼로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만의 지도자를 앞세워 싸우는 모양새를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울이나 아볼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의 말, 스스로의 생각과 주장을 펼치는 것인지도 모르죠.

 

우리의 신앙이 때론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 정작 자기의 주장에 불과한 신앙이 있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생각과 주장, 감정과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우리들이 존재합니다. 말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사랑을 외치지만 가지고 있는 신앙은 나뿐이고, 내 마음대로인 믿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쩌면 아볼로는 그런 고린도 교회를, 아니 그런 우리를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로 가득 차면 아볼로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도 우리는 마음을 열지 못할 거예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죠. 자신으로만 가득 차면 구조자마저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가 흔하죠.

 

신앙은 나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에 따르는 것입니다. 배움의 기초적 자세는 바로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죠. 그 이후에 나만의 실력이 형성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모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그 사랑, 우리의 외롭고 괴로움을 보지 못하시고 해방시키신 그 사랑,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자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 그 사랑 앞에 엎드려야 우리는 그다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한다고 싸우는 일 없고, 사랑한다고 남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일 없을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해서 타 종교인들을 죽이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지배와 점령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주여!는 우상일 뿐이니까요. 진정으로 내 안에 주님으로 채워지길 원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 주장과 분노마저 그분의 사랑 때문이길 빕니다. 내가 일하고 운동하고 숨 쉬는 모든 일이 그분 사랑의 열매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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