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0. 07:08ㆍ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사사기의 막바지에 다 달았습니다.
남은 세 장의 본문에는 사사기 마지막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남은 구절들을 묵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글로도 대하기 힘들 만큼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묵상도 힘들어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어도, 나의 생각과 달라도 주시는 말씀이 있음을 기대하며 정독하기를 원합니다.
최대한 침착하고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묵상을 시작하죠.
사사기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을 때 저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그 첫 번째 원칙은, 1절의 말씀입니다.
1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
또 등장하죠?
마치 우리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기초가 무엇인지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으면 어떤 모습인지를 알려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레위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도 또 등장하죠?
제가 사사기는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메시지 같다는 말씀 기억하시나요?
물론 우리 모두가 목회자이니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잃을 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레위인이 등장한다면, 모든 사건의 발단은 레위인에게서 출발하는 것이죠.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우리들 가운데 일어납니다.
세상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되지 못해서죠.
그런 관점에서 레위인을 바라보며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다음에 읽을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정확한 팩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신학자도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를 구하며 오늘 본문을 시작해 보죠.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레위인에게 첩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마도 다퉜나 봐요.
첩은 가출해서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곧 돌아올 줄 알았는데 넉 달이나 되자 남편은 첩을 찾으러 가죠.
그랬더니 장인이 사위를 극진히 대접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용의 전부예요.
이 내용에서 오해를 살만한 내용과 이해불가 내용이 겹칩니다.
일단 오해가 될만한 부분은 레위인과 첩과의 다툼입니다.
새번역에는 ‘무슨 일’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개역성경에는 첩이 ‘바람피운 것’으로 묘사되죠.
물론 대다수의 번역은 개역성경과 다릅니다.
그러니까 원문에는 첩이 바람피운 정황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개역성경은 그렇게 묘사해 놓았을까요?
그래야 다음 구절들이 좀 이해가 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장인의 극진한 대접은, 잘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이었을 테고요.
나중에 나올 레위인의 이해 못할 행동 또한 첩에 대한 씻기지 않은 분노에서 나오는 행동이 되니까요.
이건 그때 가서 말씀드릴게요.
아무튼 레위인이 첩에 대해 행한 행동들이 그렇게 해야 이해가 갑니다.
물론 이 또한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저만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겠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묵상하는 전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모습, 하나님을 잃은 레위인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원칙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묵상해 보면, 첩에게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일은 멈춰야 합니다.
일단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정상적인 레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죠.
마치 이미 묵상한 미가 사건의 레위인처럼 타락한 레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첩은 가출했을까요?
만약 첩이 잘못을 했다면 가출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바람을 피웠다면 도망가도 바람피운 이에게 가야겠죠.
그러나 그녀는 친정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저의 상상입니다.
어쩌면 레위인은 첩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남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봐요.
문제의 시작이 첩이 아니라 남편인 것이죠.
그것을 견디다 못해 친정을 간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장인은 왜 사위를 극진히 대접했을까?
그 극진의 내용 중의 핵심은 사위를 계속 친정에 잡아두는 것이죠.
단순히 잘 보이려고, 딸의 용서를 구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만약 그렇다면 더 빨리 집으로 보내야죠.
잘못하면 이혼을 당할 판이니까요.
그런데 장인은 계속 집에 잡아 둡니다.
그 이유가 혹시 집에 가면 또 딸이 남편에게 맞을까 봐 그런 것은 아닐까요?
시집을 간 딸이 친정에 오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절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나간 상상인가요?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레위인들은 땅도 분배받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죠?
그들에게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다른 지파들이 그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는 오로지 레위인에게 먹고사는 일을 떠나,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자가 되라는 뜻이었죠.
그런 레위인이 돈 때문에 떠돌고, 세상의 방법처럼 첩을 두고,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합니다.
그것도 아무런 죄책 감 없이 말이죠.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죠.
사실, 앞으로 나올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레위인에게 영적 양심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리 예배를 해도, 선한 양심을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리 말씀을 연구해도, 거룩한 묵상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없으니 세상과 똑같고, 하나님이 없으니 자신의 권리로 남을 해하죠.
하나님이 없으니 섬기는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이 없으니 낮은 자리의 축복도 모르죠.
성격 탓이 아닙니다.
가정교육의 문제도 아니고요.
심리적이거나 윤리적, 혹은 정신적 병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내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어도 하루를 사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아무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덧 세상과 다르지 않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덧 남들과 구별되지 않는 나를 보게 될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하루를 사는 방법은, 수많은 삶의 우연 속에서 수많은 잔잔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사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한 것도,
누구를 만나는 것도,
일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내 능력과 삶의 패턴 너머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사는 것이죠.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에는 그분의 손길이 느껴지는 축복이 임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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