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묵상59 -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의 채널에 맞추세요. 사사기19:10~21

2019. 9. 21. 07:15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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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어제의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도 내용은 간단합니다.
장인의 대접에 며칠을 묵었던 레위인은 이제 장인의 권유를 뿌리치고 길을 나서죠.
그러다 해가 저물어 유숙한 곳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한 노인이 그들을 맞아들이죠.

이 내용을 보면 마음씨 좋은 노인과 레위인의 만남처럼 보입니다.
제목을 붙인다면, 나그네를 돌보는 마음을 가져라 정도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이 정반대로 들립니다.
이왕 삐딱하게 이 에피소드를 보기로 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이 에피소드를 보는 원칙을 말씀드렸죠?
그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가 단순히 나그네 대접하는 마음씨 좋은 노인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 당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의 근거들을 말씀드릴게요.
일단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유대민족의 전통적인 미덕 하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푸는 미덕입니다.
낯선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마을 사람들이 일일이 돌아가며 대접하는 풍습이 있죠.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법률처럼 정해져 있는 관습입니다.
이것을 나그네 환대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레위인은 마을에 들어서서 성읍 광장에 앉았습니다.
성읍 광장에 앉았다는 것은,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보란 듯 나그네임을 알리는 셈이죠.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묵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생각의 단초는 또 있습니다.
레위인을 따르던 종이 여부스 근처에서 주인에게 유숙할 것을 건의하죠.
그러나 주인은 안된다고 하죠.
여부스가 이방 성읍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기브아로 가자고 하죠.
기브아는 같은 민족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같은 민족의 땅이기에 더 안심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유대민족의 나그네 환대법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노인이 대접하지 않았느냐고요.
어쩌면 오늘 본문은 그것에 초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사람이 좋은 일을 한다고 좋은 공동체는 아닙니다.
내 안에 몇 가지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은 아니죠.
우리 안에 하나님을 잃으면 전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그곳에서 간혹 좋은 일, 간혹 착한 일이 일어나도 나의 삶은 전체 분위기 속에서 흐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흐름에 대한 말씀을 전한 적이 있는데요.
세상의 흐름에 나를 맡기면 나도 모르게 그 흐름을 타고 떠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뜨문뜨문 선한 일을 해도 나의 전체 흐름은 바뀌지 않습니다.
남을 돕고, 봉사를 해도, 교회의 방향성이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는 쪽으로 흐르면, 그 봉사나 도움은 한낱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분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나의 삶 전체를 그분에게 맡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나의 가치관, 나의 사상과 이념까지 그분의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의 돕는 마음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나를 맡기세요.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의 채널에 맞추세요.
그러면 선한 행동과 말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끄시게 하세요.
주님이 나의 법이 되게 하세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주님의 생각이 나를 통해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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