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6. 06:59ㆍ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어제까지는 삼손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드디어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되네요.
그런데 시작부터 애매합니다.
삼손은 부모님에게 결혼 승낙을 부탁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결혼에 대해 부탁하는 일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결혼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이 큰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당연하죠.
그런데 하필 삼손이 찍은 여인이 블레셋 여인입니다.
단순히 이방 여인이 아닙니다.
우리로 생각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여인과 결혼하겠다는 것과 비슷하죠.
부모의 반대는 당연해 보입니다.
또한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는 것도 당연한 듯 보여요.
그런데 저는 의문이 하나 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문제가 삼손의 이야기에 첫 주제일까요?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것일까요?
게다가 삼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옳은 것일까요? 그른 것일까요?
제가 헛갈리는 것은 삼손의 태도에 따른 부가적인 설명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4 그의 부모는, 주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으려고 이 일을 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런 말인 거죠.
그렇다면 삼손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을까요?
지난 본문의 끝에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자랐다고 되어 있었으니 알고 있었겠죠?
또한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고 했으니 그가 결혼하겠다는 것은 정욕의 차원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삼손의 일대기를 잘 알죠.
그의 행동이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품는지도 모르죠.
성경을 묵상할 때 저는 다른 책을 참조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만 텍스트로 삼아 묵상을 하죠.
그렇다고 완전히 참조하지 않는 다른 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거의 빠짐없이 다른 성경번역본을 함께 보죠.
우리가 읽는 새번역뿐만 아니라 개역성경, 공동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 메시지 성경, NIV 등을 참조하죠.
같은 성경이기에 다른 책이라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에 뛰어나지는 않지만 가끔 원문 성경을 보기도 합니다.
꼭 사전이 필요하지만 말이죠.
그런데 조금 전에 언급한 4절의 말씀의 번역본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크게 개역성경과 새번역이 다릅니다.
개역성경은 이렇습니다.
4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개정개역본)
그러니까 블레셋을 치려는 계획을 가진 이가 삼손이라고 번역해 놓은 거죠.
그러나 새번역은 어떨까요?
4 그의 부모는, 주님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으려고 이 일을 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새번역)
계획을 가진 이가 삼손이 아니라 주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원문에는 ‘그’라고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할 때 ‘그’를 개역성경은 삼손으로, 새번역은 ‘주님’으로 인식한 거죠.
아마도 개역성경 번역자들은 삼손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번역을 그렇게 한 거겠죠.
그러나 새번역을 번역한 신학자들은 삼손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고 느낀 것이죠.
삼손은 모르지만 뒤에서 하나님은 그런 계획으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참 많이 다르죠?
이 번역본의 비교만으로 제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새 번역의 느낌이 더 와 닿더라고요.
물론, 새번역만 그렇게 번역한 것은 아니고, 공동번역이나 NIV도 같은 입장이더라고요.
또한 삼손의 이후 행적들을 감안하면 더욱 이해가 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삼손이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이는 장면이 나오죠.
유명한 장면입니다.
아마도 이 장면만 보면 압도적이어서 그의 능력에만 집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암시하는 글들이 도처에 깔려있어요.
그가 사자를 만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딤나의 포도원이었어요.
그곳에는 왜 갔을까요?
나실인이 지켜야 할 것 중에 포도나무의 소산들을 먹지 말라는 것이 있죠.
그냥 합리적 추론입니다.
게다가 찢어 죽인 사자의 꿀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는 파리떼가 꼬여야 하는데 꿀이 나오는 것은 좀 이상하죠.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다고 다른 이상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꿀을 먹고, 심지어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기도 합니다.
이상한 점 발견하셨어요?
다시 나실인의 지켜야 할 점을 상기하죠.
죽은 시체는 가까이도, 만지지도 않는다는 것 말이죠.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들게 되죠?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는데, 그의 복을 받아 자랐는데 왜 삼손은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은혜와 복을 주시죠.
그러나 그 사랑과 은혜를 누리려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응답해야 하고, 은혜를 기억해야 하죠.
그분의 복을 세어볼 줄 알아야 하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도 깨달아야 하죠.
한 가지만 더 첨언하죠.
성령이라는 말은 주로 신약에 많이 쓰입니다.
구약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영이라고 쓰이죠.
이렇듯 같은 성령이지만 구약과 신약의 성령은 조금 다릅니다.
구약의 성령이 주로 능력에 치중되어 있다면,
신약의 성령은 주로 인격에 치중됩니다.
구약의 성령이 주로 기적과 일시적 현상에 집중된 반면,
신약의 성령은 주로 삶의 변화에 집중되죠.
우리에게 능력이 주어진다고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길이 열리고, 기적이 일어난다고 은혜가 아니에요.
합격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돈을 벌어도 그것이 은혜가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복이 아니죠.
진짜 복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주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 그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으십시오.
무엇을 받았는지 보다, 주님의 영을 느끼면서 사세요.
놀라운 능력보다, 지켜야 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삶을 사세요.
그때 진정 더 놀라운 변화들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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