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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2]고귀한선택

갖춰진 곳이 아닌 황무지를 택하라






마가복음 1:9~13,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우리교회는 개척초기부터 공동목회로 시작했습니다. 개척할 때 함께 동역했던 목사님은 현재 거창고등학교에 가 계신 오종신목사님입니다. 당시 신학대학원생으로 전도사님이었던 오목사님과 함께 3년간 동역을 했습니다. 오목사님은 우리교회에서 결혼도 하시고, 목사 안수도 받고, 유학도 하셨죠. 제겐 정말 귀한 후배 목사님이십니다. 그 오목사님은 보통 수재들이 간다는 거창고등학교 출신인데요. 그것도 거창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지낼 만큼 리더십도 있는 분이었죠. 대학에 와서도 공부를 잘하셔서 교수님들이 많이 기대하였던 학생이었죠. 아마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지금쯤 학위를 하고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모두들 이해 못할 선택을 했습니다. 교수들이 추천하는 학교와 소위 주류신학교를 다 거절하고 텍사스 달라스의 작은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것이죠. 물론 그곳에서는 박사학위도 드물지만 학위를 한들 한국에서 인정해 줄 학교도 없을만큼 작은 학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학교를 간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목표는 학위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픈 갈망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부터 성경공부를 다시 했답니다. 물론 취미로 유학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 유학을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교회와 여러사람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고요. 또한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졸업까지 했습니다. 물론 5년동안 석사공부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기왕 공부하러 간 김에 박사학위도 하고, 좋은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이어가라는 여러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는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고 하시면 돌아오겠다고 누누이 제게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쓸 곳이 있다는 요청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죠. 참 대책없는 목사님입니다. 그 정도 공부하고, 그 정도 실력이면 어디든지 할 일이 있을텐데요.


그런데 이 분이 제게 말하기를 선배 목사 하나를 잘못 만나 그야말로 인생을 망쳤답니다. 뜻하지 않게 우리교회를 만나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노력과 실력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인 줄 알았데요.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나의 노력과 실력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을 말입니다. 본인은 목회자가 되어서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꿈꿔왔었답니다. 그런데 목회자란 하나님이 쓰시도록 자신을 드리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데요. 그러니까 자신의 인생은 우리교회를 만나 세상적으로 망가지고, 영적으로는 새로워졌다고 하더라고요. 원망인지 감사인지 모를 말을 웃으며 제게 했드랬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대충 3종류의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분들이거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 버티다 버티다 떠나는 분들이거나, 아니면 오목사님처럼 인생을 망치는(?) 분들이거나 인 것 같아요.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망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죠.


고전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철저하게 망하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는 능력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 그 이야기를 이어볼까 합니다. 현재 거창고를 있게 한 전영창선생님에 대해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죠. 전영창선생님은 해방 후 미국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는데요. 해방 이후 국비로 신학 유학을 한 첫 번째 사람일 만큼 수재였죠. 그러나 유학생활 중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는 유학을 한들 조국을 잃으면 무슨 소용인가?라는 마음으로 졸업 6개월을 앞두고 중도에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학교 측이 그를 위해 조기졸업을 시켜준 사건은 유명합니다.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이었으면 이런 일이 생길까요? 사람은 주어진 일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성심을 다해야 하나봅니다. 학교측이 전영창선생님께 베푼 것은 조기졸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한국을 돕자는 캠페인을 벌여 많은 성금을 모아 주었습니다. 전영창선생님은 그것을 가지고 부산으로 와 병원을 세워 전쟁의 고통가운데 아픈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거기서 장기려박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죠. 가난해서 병을 치료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제 전쟁의 상흔이 가실 즈음 명문대학에서 총장 초빙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폐교 위기에 있는 거창고등학교의 교장 제의도 들어옵니다. 빚더미에, 학생들도 없고, 정부로부터는 차압이 끊이지 않는 학교였죠. 비교가 되지 않는 제의지만 전영창선생님은 거창고를 선택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광야부터 시작된다는 신념 때문이었죠.


믿음의 사람들의 모든 삶의 여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출발이 황무지와 같은 광야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400년이 넘는 애굽생활을 접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 10년만 살아도 다른 곳으로 가기 힘든 일인데요. 400년동안의 삶의 익숙함을 버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더 좋은 곳, 더 편한 곳으로 간다면야 그깟 옛것을 버릴 수 있죠. 그런데 출애굽을 한 유대민족에게 놓인 곳은 광야였습니다. 차라리 노예생활이 더 나았다고 푸념할 정도의 황무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시작은 거기서 부터였습니다. 모세도 40년간 광야 생활을 한 후에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의 예배로 그의 영성이 다져졌고요. 바울도 회심한 후, 아라비아광야에서 옛 가치관들을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인데요. 성경은 세례 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죠.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인생은 광야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보통 그것을 회개라고 하는데요. 회개라는 것이 바로 광야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손을 들죠. 마치 홀에 빠지면 구해달라고 손을 뻗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우리는 손을 들지 않죠.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 없거나, 합리적인 변명이 가능하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빠져나올 구멍이 있으면 그것에 힘을 쓰지 항복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할 방법이 없고, 주님의 처분만을 바라는 것이 회개니까요.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구요. 아무도 나를 가려줄 사람 없을 때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합니다. 바로 광야인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손길에는 틀림없이 광야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꿈을 가끔 꾼다죠.


“저 분이 우리 엄마가 아닐거야... 내 엄마는 어디선가 나를 찾고 있을 거야... 어느 날, 리무진을 타고 나를 데리러 올지도 몰라...”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대기업을 목표로 열심을 다합니다. 왜 우리는 부모의 재산을 요구할까요? 왜 우리는 선배들, 미리 펼쳐놓은 자리, 완성된 곳을 갈망할까요? 이유는 간단하죠. 미리 만들어진 자리의 덕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미리 만들어진 돈의 수혜를 받아보겠다는 것이죠. 그렇게 나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려, 아픔을 겪지 않으려 마음먹죠. 그러면 참 좋겠는데요.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미리 만들어진 자리, 미리 주어진 돈은 나에게 굴복을 요구합니다.


내 자리로 들어와~ 편안하게 해 줄게... 대신 이젠 내 뜻대로 하렴...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가게 되죠.  


조금이라도 기댈 곳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저는 돈 한 푼 없이 소위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처럼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요. 생활비는커녕 살 집도 없어서 처갓집에 한동안 얹혀살았습니다. 물론 처갓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었어요. 장인어른이 평생 모으신 돈으로 퇴직 후 조그만한 집 한 채를 마련하셨는데요. 졸지에 저희 때문에 그 집을 팔고 좀 더 큰 집으로 전세를 가셨어요. 그 집은 저희들과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작은 집이었거든요. 처갓집은 저희 도와주신다고 어찌보면 세상적으로 큰 손해를 보신 셈이죠. 그러다 장인어른 돌아가시고, 저희도 따로 집을 장만해야 했습니다. 개척 후 교회가 어느정도 안정되기는 했지만 목회자의 집을 마련할 만큼 되지는 않았던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단 재정적인 문제를 떠나 목회철학과 교회 운영 계획에 더 가까운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저희 가정에 가장 여러운 시기를 맞이했었죠. 하루아침에 집을 구할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며칠을 잠도 못 이루고 고민하며 기도했는데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죠. 저를 잘 아시는 분은 한번 이 질문에 정답을 맞춰보시죠. 제가 주님께 기도를 더 많이 했겠어요? 아니면 은행대출 문의를 더 많이 했겠어요? 기도라고 대답해 주신 분들께는 감사를 드립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해 주셨네요. 죄송하게도 저는 기도는 했지만 기도보다 훨씬 은행을 더 많이 찾아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방법을 구해야 했으니까요. 뭔가 방법이 있으면 우리는 기도보다 그 방법을 더 찾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손 놓고 있을 수 없죠. 그런데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우리는 주님보다 그곳에 더 사력을 다합니다.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은행에서는 목사가 제일 신용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단 한 푼도 은행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아예 신청조차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느끼는 무력감과 가슴 아픔을 아십니까?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아이들은 커 가는데 당장 2주 후에 길거리로 나 앉아야 하는 절박함에도 무기력한 자신을 보는 아픔을 아시나요? 정말 아무것도,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그때, 정말 창피한 일이지만 저는 그때, 처음으로 주님께 항복하며 기도했었습니다. 더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기도 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죠. 결과가 궁금하신가요? 이미 이 사건을 설교한 적이 있어서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데요. 소위 제가 청년시절에, 고향 선배에게 사기 비슷한 걸 당한 적이 있어요. 유명대학을 나오고 당시 외국계 펀드회사에 입사한 선배가 찾아와 투자를 권했드랬습니다. 그것이 실적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당시 저는 음반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던 터라 제 통장에 500만원쯤 있었는데요. 그것을 드렸습니다. 혹 하는 마음도 있었죠. 물론 많은 부분 고향선배를 돕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만 투자가 뭔지도, 펀드가 뭔지도 몰라도 은행보다 더 이자를 붙일 수 있다는 말에 혹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돈을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연락이 두절되었어요. 그러던 분이 거의 20년 만에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만나자해서 만났는데요. 제게 다짜고짜 거액의 현금이 든 흰 봉투를 내밉니다. 사정인즉슨, 투자회사에서 일하다 퇴직 당하고, 이후 여러회사를 전전했데요. 그러다 외국은행에 취직을 해서 간부까지 되었답니다. 그런데 최근에야 제 생각이 나더래요. 어렵게 자신을 도와줬던 동생이 자꾸 꿈에도 나타나더래요. 그래서 당신 투자금액을 시간과 수익률로 따져서 가져온 거라고 하며 봉투를 내밉니다. “이거 니 돈이다.”라고 하면서 주는 겁니다. 그것으로 저희는 집을 옮길 수 있었어요. 신기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은 신기하다 여기겠지만 그때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였기 때문에 제가 뭔가를 해서 해결한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 아닙니까? 오직 하나 기도한 것 밖에 없으니 어찌 이 기적같은 일을 운이나 제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 일이 있은 후 제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낙심하고 좌절해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돈이 없어, 문제가 많아서 포기하고 넘어져 못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 이후로 저는 돈 때문에 염려는 했어도 낙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거창고교 전영창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요. 거창고교에 부임하니 학생은 8명 있더랍니다. 학교를 살리려 막 희망을 갖고 일을 하는데 교육청에서 차압이 들어왔대요. 일주일 안에 빚을 갚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통지가 왔답니다. 돈이 어디 있어요? 학교 뒷산을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더랍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가고자 좁은 길로 왔습니다.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세요.”


정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지만 아무 응답도 없이 가슴만 답답해졌데요. 절망이 몰려왔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서울에 남을 걸’, ‘그때 총장으로 갈걸’,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면서 터덜터덜 산을 내려오는데 학교 선생 하나가 전보를 들고 오더랍니다. 전보를 보니 미국에서 왔는데 모르는 사람이더래요. 학교 운동장에서 그 전보를 뜯어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더랍니다.


“당신의 통장에 2,080불이 입금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왜 귀족의 집안, 권력의 그늘에서 출발하지 않으셨는지 아세요? 왜 예수님도 광야에서 출발하셨고, 시험을 당하셨는지 아세요?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생각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고 자라난 자녀가 좋은 인품을 지니듯 광야에서 출발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다 갖춰진 곳, 다 셋팅된 곳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황무지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이 흐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확신이라는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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