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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2]고귀한선택

가능성이나 기회가 없는 곳을 택하라




마가복음 6:35~39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이 새벽을 위해 수고해 주시는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차량으로 봉사해 주시는 분들도, 매일 예배 셋팅을 해 주시는 분들도, 아침을 준비해 주시는 분들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우리교회 밥이 참 맛나요. 지난주간, 감기와 함께 체하기도 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요. 주일, 교회 밥은 두 공기만 먹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요. 제가 빵도 잘 안 먹는데요. 이번 주간 아침 빵도 너무 맛있습니다. 여기저기 손길들에 무척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아침 빵을 구워 잼을 발라 먹는데요. 잼 상표 가운데 [복음자리]라는 이름의 상표가 있더라고요.


‘복음자리’


신앙인에게는 매우 낯익은 단어죠? 혹시 그 말이 그 말? 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맞습니다. 복음이 있는 자리라고 해서 복음자리라는 상표인데요. 이 상표는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에서 만드는 제품들의 브랜드입니다.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는 특별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 지역에서 버려진 듯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해 한 사회운동가가 헌신을 하여 빈민구제 운동을 하다가 그들의 삶의 주거지를 개선하는 방편으로 공동체 마을을 형성했던 것이 바로 [복음자리마을]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발전해서 사회복지재단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복음자리 과일잼의 수익금은 빈민구제사업을 위해 쓰여집니다. 기왕 잼을 사시려거든 복음자리 상표의 잼을 사세요.


오늘은 방금 말씀드린 이 사회운동가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그의 이름은 제정구선생인데요.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4수 끝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전도유망한 학생이기도 했죠. 그런 그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은 그가 빈민촌에서 야학을 하면서였습니다. 청계천의 판자촌을 봤을 때 그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야학을 할 때, 공부하려오는 학생 중에 나이 많은 엿장수 아저씨가 있었데요.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어떻게든 공부를 하려하는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공부를 하다가 객혈을 하고 말았습니다. 둘러업고 병원에 달려가 보니 결핵 3기라고 하더랍니다. 의사는 매우 위험한 상태라며 당장 쉬어야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제정구선생은 그 사내에게 그 말을 전해 주었는데요.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집에서 쉬면 더 빨리 죽게 될텐데요. 선생님”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집에서 쉬면 당장 굶어야 하는데 그러면 더 빨리 죽지 않겠습니까?”


다음날부터 제정구선생은 그 사내의 투병을 돕기 위해 그의 엿판을 끌기 시작했답니다. 그 이후로는 교회에서 판자촌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넝마주이도 하고, 부자집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답니다. 그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졌데요. 그렇게 그는 판자촌에서 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판자촌 봉사를 하면서 만나 결혼한 부인의 전언에 따르면, 결혼 전에 남편이 이런 다짐을 자신한테 받았답니다.


“나는 평생 판자촌에서 살거야. 행여 혹시나 판자촌에서 나가는 날이 있겠지라는 기대는 하지마. 돈을 많이 벌게 될 가능성도 없으니 그것도 기대하지마. 그래도 당신을 굶기지는 않을께.”


그렇게 제정구선생은 학교를 나온 후 판자촌에서 빈민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판자촌에 살면서 그들은 삶의 원칙도 세웠어요.


1) 빈민들을 돕는다는 핑계로 프로젝트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2) 그냥 산다.
3)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를 필요로 할 때마다 앞장선다.
4) 그들 스스로 하는 일에 함께하고 거든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들을 대변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고, 당시 빈민운동을 하는 이들이 그랬듯이 정부 기관원들의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강제철거를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갔는데요. 빈민촌의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경찰서 앞에 드러눕는 바람에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며칠 만에 풀려나자 이번엔 빈민촌 사람들이 천에다 매직으로 글씨를 쓴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환영식을 해 줬답니다. 무슨 금메달 선수 환영식처럼 말이죠. 그렇게 판자촌에서 살면서 삶 개선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요. 공동체 마을을 만들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더불어함께 살아가는 삶의 원칙을 가지고 주거개선에 나섰습니다. 이에 독일교회에서 도움을 주어서 공동체 마을인 복음자리마을도 만들었죠. 그러다보니 정부의 압박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툭하면 불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해졌죠. 그러던 와중에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데요. 제정구선생은 슬슬 걱정이 몰려왔답니다. 끼니 걱정을 하게 된 것이죠.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경비나 일용직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지원하는 일마다 번번이 틀어졌는데요. 그것이 다 정보기관의 장난이었답니다. 그런 그에게 정보기관으로부터 제안이 하나 왔습니다. 2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즉각 취직을 시켜주겠다구요. 2가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1. 판자촌에서 살지 말 것
    2. 독일교회가 파송한 정일우신부와 함께 살지 말 것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제정구선생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 나의 갈 길이 분명해졌어. 나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정보기관의 뜻을 거스르는 거거든. 이제 더욱 분명히 알았어. 하나님이 나에게 품으신 뜻은 내가 판자촌에 살라는 것이고, 정일우신부와 함께 일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그날 그는 가진 돈을 다 털어 성경책 하나는 구입했답니다. 그리고 그 성경책에 이렇게 썼데요.


“축! 취직 기념(하나님께)” 1976년 9월 1일


이 후 제정구선생은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7년 동안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청계천 판자촌의 이주계획과 개선사업과 집 없는 철거민, 도시 빈민들을 돕는 사업에 역점을 두며 일하다가 1999년 55세의 젊은 나이에 판자촌 생활로 얻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본문입니다. 소위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불리는 본문이죠. 내용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이 본문을 통해 오늘 함께 생각을 나누려 하는 것은 제자들과 예수님의 선택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조금 외진 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은 찾아온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죠. 그런데 날이 저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걱정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요청을 합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굶주려 배고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여기는 허허벌판입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서 요기를 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곳은 끼니를 채울 방법이 전혀 없는 곳이었습니다. 외딴 곳이기에 가능성마저도 없는 곳이죠. 제자들의 생각은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근방의 농가나 마을로 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죠. 그것이 가장 현명하고 배를 채울 가능성이 있는 대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불가능합니다. 200 데나리온이나 필요한 걸요?”


셈이 빠른 빌립이 이렇게 말하죠. 1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 5만원쯤 되겠네요. 1데나리온으로 500원짜리 빵을 100개정도 살 수 있겠죠?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면 그 자리에 한 2만명쯤 모였다는 계산이 나오죠. 장정만 5천명이었으니 어린이와 여자를 합하면 그 정도 되었겠죠?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의 기초는 바로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또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시죠.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생각해 보세요. 빵이 만약 있다손 쳐도 다 먹이려면 모든 사람들에게 빵이 있어야 하죠. 몇 개의 빵이 있다고 가능합니까? 세는 것이 오히려 민망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이 결과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이 놀랄만한 일인가요?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는데, 이 이적이 쓰인 것이 단지 그의 출중한 능력을 드러내려는 의도였을까요? 능력이 출중함을 드러내시는 이적은 결코 아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방법의 차이입니다. 제자들을 위시한 우리는 언제나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가능성이 있는 곳이 가장 유능한 곳이죠. 그것을 우리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어디에 가능성이 더 있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죠.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가능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주님이 하시겠다시면 불가능하다는 우리의 판단도 무용지물이란 사실말이죠.


아브라함을 다 아시죠? 그는 조카 롯과 함께 살았는데 세력간 분쟁이 일어 갈라서게 되죠. 그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가겠다.”


그 때, 롯은 땅을 살폈어요. 오른쪽 땅을 보니 물이 넉넉하고 비옥했습니다. 그가 주님의 땅과 같다는 표현을 할 만큼 좋아보였던 것이죠. 그가 말로만 들었던 상상의 땅 에덴동산을 떠올릴만큼 그 땅은 좋아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왜요? 가능성이 있는 땅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는 반대의 땅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땅이었습니다. 우리가 집을 구할 때도 언제나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은 유용성을 넘어 가능성이 지배적입니다. 이 땅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땅일까? 얼마나 기회가 있을까를 따지죠. 이 롯의 선택은 탁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간 땅은 흥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대도시를 이루었죠. 그런데요. 사람들의 눈은 다 똑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은 남의 눈에도 좋아보이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사람이 몰립니다. 사람이 몰리니 대도시가 되고 커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경쟁하며 살아야 하니 사람들은 악해지고, 죄가 범람하게 되죠. 그렇게 좋아보이던 땅은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됩니다. 멸망한 땅, 그 곳 말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땅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보는 땅, 이곳을 다 너에게 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볼때, 단순히 위인전 전기를 읽듯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선택과 그분의 방향성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위 그분의 성공철학을 볼 줄 알아야 하죠.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어려울 때, 광야에 있을 때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나의 가능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미래를 추구하면 계속 그 미래의 노예가 되죠. 가능성을 추구하면 계속 그 가능성에 목숨을 겁니다. 로또를 사람들이 왜 살까요? 그것은 가능성을 사는 것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살 가능성을 닫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닫으셨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죠. 그러나 사람들은 끝이라고 했던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시작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모든 구원이 나오고, 정의가 나오고, 열매가 나옵니다. 살길을 찾아 가능성을 쫓으면 잠시 삶은 좋을지 몰라요. 먹고 살기 위해서 잠시 사명을 버리고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면 배는 불러요. 그런데 그것이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방향만 다를 뿐, 우리에게는 늘 먹고사는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결국 사명은 온데간데 없어지죠. 내 가능성, 내가 추구하는 기회보다 주님, 그분이 여러분의 가능성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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