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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2]고귀한선택

한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를 택하라




마태복음 21:1~11,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다. 그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리하면 곧 내어줄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셨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 



휴거라는 말을 아십니까? 휴거携擧란 ‘이끌려 간다’는 뜻의 한자어인데요. 주로 종말론적 시각으로 쓰이는 이 말은, 마지막 날에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휴거라는 말이 초등학교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단어가 초등학생들이 쓸만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혹시 종말론자들이 초등학교에까지 퍼져서 이런 말이 유행한 것일까 사뭇 염려가 되어 알아봤는데요.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유행한다는 휴거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말하는 휴거란 ‘휴먼시아 거지’의 준말이었습니다. 휴먼시아란 공기업이 시공하는 아파트의 브랜드 명인데요. 주로 임대아파트나 특수계층의 아파트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그곳에 사는 아이들을 놀리면서 휴거라는 말을 쓴 것이죠. 요즘같은 신학기 처음 아이들이 만나면 통성명을 하겠죠? 그리고 통성명과 함께 빠지지 않는 질문들이 있답니다. 그것은 “너 어디 사니?”죠. 한때,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말이 유명할 만큼 출신성분을 묻는 것만큼은 철저한 한국사회이기에 어디 사는지, 어떤 부류인지 묻는 것은 빠지지 않죠. 그 다음으로 묻는 것이 “너희 아파트는 몇 평이냐?”는 것이랍니다. 이런 과정에서 휴거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죠.


옛말에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이라는 키워드에는 ‘한 가운데’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관심하는 그 ‘한 가운데’로 가야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하고, 가지려는 것을 가져야 하고, 입거나 먹거나 해야 하는 것들도 모두 많은 사람들이 관심하는 그 한 가운데에 있죠. 언제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언제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 되죠. 그것이 세상의 성공 법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와는 조금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곳과 자라나신 곳이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Bethlehem이라는 이스라엘 남부 작은 마을입니다. 자라신 곳은 그와는 정 반대에 있는 북부 나사렛Nazareth이라는 곳이죠. 나사렛은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자라 30년 동안 사셨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특이합니다. 우리들이야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죄다 알지만 그 곳은 그야말로 깡 시골 촌동네입니다. 오죽하면 구약성경에는 나사렛이라는 지명 언급이 단 한 차례도 없었겠습니까!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는 갈릴리지방의 63개 촌읍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지방 내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가 언급한 그 촌읍들 가운데 나사렛이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나사렛이란 동네가 작고 보잘 것 없었던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는 아예 무시와 경멸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후손들에게 10가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것을 훈요십조訓要十條라고 하는데요. 그 10가지 가르침 중에, 차령산맥 남쪽, 즉 지금의 전라도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서 역모의 기상을 품었기에 그 지역 사람들은 중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금의 지역차별의 시발점이 된 것이죠. 중국에는 우리나라 도와 같은 성이 23개가 있는데요. 동북부에 있는 3개의 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동북삼성東北三省이라고 부릅니다. 주로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한인교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죠. 그중에 교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연길이라는 곳인데요. 그곳은 조선족 자치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연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딱히 조선족 소수민족들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지역이 중국 중심부에서 멀기도 멀지만 예부터 중국 사람들 사이에는 연길지역 사람들은 사기꾼이 많다는 구전이 내려와 그 인식이 머리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나사렛이라는 동네도 사람들에게 멸시와 경멸의 마을이었습니다. 훗날 예수의 제자가 된 빌립Philip이 역시 12제자 중 한 사람이 된 나다나엘Nathanael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 나다나엘은 이렇게 말했었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는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멸시와 천대의 동네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그 유명한 예루살렘이 아닌 것 또한 이채롭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한 가운데가 아닌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셨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그분은 왕손으로 태어나지도, 지배자의 권력을 등에 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존경받는 제사장 가문의 아들도 아니었고, 그 흔한 명문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변방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죠.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로 추앙하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당당한 말이 아닌 초라한 당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늘 ‘한 가운데’가 아니라 ‘변방邊方’이셨습니다. ‘관심 받는 곳’이 아니라 ‘관심 밖의 곳’에 서 계셨습니다. 그분의 선택은 늘 그랬습니다. 그런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행실도 그랬습니다. 그가 어루만지고 고치고 위로한 이들은 하나같이 변두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받고, 억눌리고, 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늘 이런 질문에 부딪칩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참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리에 서야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더 많은 세력과 더 많은 권세를 얻어야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왕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멋지고, 힘 있고, 권력과 권세가 있어야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추앙받으며 수월하게 사역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세요. 우리가 좁은 길로 가야하는 이유는 좁은 길이 좋은 길이어서가 아니라 좁은 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으셔서입니다. 우리가 한 가운데보다 가장자리를 가야하는 이유는 그곳에 젖과 꿀이 흘러서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빈 자리, 변방의 자리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많은 것을 얻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사느냐 아니냐일 뿐이죠. 한 가운데에서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거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한 복판보다 변방을 사모하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십니까?


한 가지 이야기를 드리며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여러분들을 위해 한 가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나를 위해 돈을 많이 벌 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위해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일입니다. 전자를 선택한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풍요한 먹을 것과, 누릴 것을 다 얻었습니다. 그 대신 바쁜 아버지를 두었고, 그와 대화할 시간은 없어졌습니다. 나는 늘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반면, 후자를 선택한 아버지는 서울을 뒤로 하고 시골 작은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좋은 것을 배불리 먹지는 못했습니다. 자가용 대신 걸어 다녀야 했고, 좋은 운동화 대신 고무신을 신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늘 곁에 계신 다정한 아버지를 두었고, 아버지는 늘 나와 놀아주었습니다. 그와 연을 날리기도 했고, 고기잡이도 했으며, 봄날에는 풀밭을 뒹굴며 씨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늘 아버지의 기도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시죠? 그분과의 긴밀한 교제와 동일한 마음을 품는 믿음의 관계에 있으시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향한 마음과 소원을 품고 계시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신앙생활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그 신앙생활에는 어떤 아버지를 내가 꿈꾸는지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결정됩니다. 어떤 아버지를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방향도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버지를 지금 사모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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