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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2]고귀한선택

왕관이 아닌 십자가를 택하라




갈라디아서 2:20,

나 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야구경기의 메카인 미국에서 여자소프트볼 선수권 라이벌전이 열렸습니다.  그 라이벌 주인공은 워싱턴대학Central Washington University과 오레곤대학Western Oregon University이었는데요.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대학여자소프트볼 양대산맥이었습니다. 우리로 보면 연고전과 같은 라이벌이죠. 더군다나 이날 경기는 단순한 라이벌전을 넘어 챔피언 결정전이었습니다. 경기는 초반에 점수를 뽑은 워싱턴대학이 2:0으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끝난다면 워싱턴대학의 승리가 눈앞에 있었는데요. 마지막 공격에서 오레곤대학이 기회를 얻었습니다. 2명의 주자가 루상에 나가있는 찬스인데요. 때마침 타자는 4학년 선수인 사라Sara Tucholsky라는선수였는데요. 이 선수는 베테랑이었지만 이번대회 내내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키도 작고 왜소해서 장타를 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죠. 워싱턴대학은 좁은 수비를 촘촘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타격을 하자 공은 펜스를 넘기는 홈런이 되고 말았습니다. 단숨에 3:2 역전이 되는 순간이죠. 하지만 문제는 이때 발생했습니다. 타격을 하고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던 사라선수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는데요. 그냥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무릎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뛰기는커녕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경기규정상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같은 팀 다른 선수나, 의료진, 혹은 코치진에게 도움을 받으면 그 선수는 아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운동장에서 쓰러져 그라운드를 돌 수 없는 사라선수는 홈런을 치고도 아웃이 되는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경기는 2:2 무승부로 다시 경기를 해야하는 것이죠. 역전을 당한 워싱턴대학으로서는 천금의 기회를 얻은 셈인데요.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대팀인 워싱턴대학의 말로리 홀트만선수와 리즈 월러스선수는 심판에게 달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상대 팀에서 홈베이스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어떻게 되나요?”


심판은 상대 팀에서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말로리와 리즈는 사라를 양 옆에서 들고 그라운드를 돌았습니다. 한 베이스씩 갈 때마다 잠시 구부려 사라의 발이 베이스를 밟도록 하고 또 돌고 그렇게 해서 홈까지 들어왔습니다. 결국 워싱턴대학은 그 경기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경기가 끝난 이후 미국 전역에서 대학별 운동경기마다 상대편 다친 선수들을 도와주는 이상한(?)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패배라고 말하죠. 지고도 결국 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오면 우리들은 움츠리고 소극적이 되어버리죠. 두려움은 우리들을 자신의 존재가치로 길들여 버립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라는 것이 무조건 나쁜 존재만은 아닙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주신 이유가 있죠. 겁 없이 뛰어내리거나 도전하면 다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라는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조심성을 심어주죠. 그것은 두려움의 순기능입니다.히브리말로 두려움은 야레ירא인데요. 야레라는 말은 본시 우리말로 두려움보다는 경외심이 더 적절한 번역입니다. 경외심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영성인 셈이죠. 그러니까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지 대상이나 사물, 혹은 다른 감정이 아니었던 것이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창조시대 첫 사람 아담이 야생동물들을 무서워하던가요? 본래 두려움은 하나님께만 향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옴으로 두려움의 역기능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우리에게 몰려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경쟁과 승부로 보는 관점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질 것 같은지는 너무나 잘 알죠.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이 발달합니다. 두렵다는 것? 무섭다는 것! 이것들은 내가 진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죠. 이길 것 같으면 교만해지고, 질 것 같으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죠. 틀릴 것 같아 두렵고, 헤어질 것 같아 두렵고, 못할 것 같아 두렵죠.


여러분들은 가인과 아벨에 대해 잘 알고 계시죠? 살인이라는 큰 문제를 야기했던 이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나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의 문제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승부로 드린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지는 것으로 잘라버린 것이죠. 오늘날 교회가 놓치고 있는 문제 중, 이런 세상의 관점이 있습니다. 복음을 승부의 문제로 만들어 버린 것이죠. 교회와 세상을 경쟁의 구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누군가를 짓밟아 이겨야 하는 관점이 교회 내에 만연하죠. 예배는 그냥 주님과 나의 문제이지 남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헌금을 드리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헌금은 그냥 내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이지 남과 비교하는 승부가 아닙니다. 기도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그냥 앉아 있을 때가 있어요. 목사쯤 되면, 장로쯤 되면... 이정도는 해줘야지... 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보는 사람이나 전부 다 신앙을 경쟁과 비교의 승부로 봅니다. 기도는 그냥 하나님 앞에 선 나와 그분과의 대화일 뿐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쇼파에서 아무 때나 아버지 배 위로 몸을 던지죠. 많은 사람들은 사리분별을 할 줄 몰라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어린아이들은 승패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바로 모든 관점에서 경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도 다루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거의 마치실 무렵 제자들은 때 아닌 큰 자 논쟁을 하죠.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인데 제자들은 참 눈치도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세우고 말씀하시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때, 불러 세우신 어린아이는 우리가 볼 때 막 뛰어다닐 것 같지만 성경은 어린아이라고 번역된 단어에 파이디온paid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파이디온과 파이다리온paidarion은 완전히 다른 뜻인데요. 파이다리온이 보통 우리가 말하는 어린이이고요. 파이디온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베이비, 즉 애기입니다. 두려움 없이 아빠의 배 위에 대책 없이 뛰어내리는 그 애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고 말한 데에는 순수나 천진난만보다 더 깊은 뜻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세상을 승패로 구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게임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믿음의 사람들은 이기고 지는 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복음은 꼭 이 개념이 들어갑니다. 내가 지면 안 되는 게임을 하게 되어 정복적인 복음을 전하죠. 그러나 예수님은 지고이기는 게임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고이기는 상황으로 점철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었죠. 특히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통해 정치를 바꾸겠다고 여겼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살면 이길 수가 없는 것이죠. 승패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기지 못하면 절망하고, 지게 만든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승패와는 상관없이 정의의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승패와는 상관없이 사랑의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냥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이죠.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하면서 거의 모든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남부 헤브론Hebron 땅은 아직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곳에는 가나안에서도 가장 강한 거민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아무도 그곳에는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본들 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람 하나가 등장합니다. 한때, 모세의 후계자로 이름을 올렸던 갈렙Caleb이 그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밀려 40년 넘게 무명으로 살았던 갈렙이 85세 노인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죠.


“이 산지를 나에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이 바로 이곳입니다.”


예수님은 수도 없이 역설적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요. 가령,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거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라’거나, 혹은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다.’등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설이라 부르지만 사실 역설적인 행동은 우리가 하는 겁니다. 역설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오히려 순리이죠. 그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길이기 때문이거든요. 그게 무엇이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진리 아닙니까?


지난주일, 십자가목장에서 권사님 한 분이 나물하나를 무쳐오셨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의 이 나물은 망초대라고 하네요. 맛있게 먹는데 옆에서 장로님이 어떤 지방은 망초대를 안 먹는데요. 어떤 지방에서는 망초대가 좋은 음식인데 어떤 지방에서는 망초대를 줘도 안 먹는 것이죠. 요즘은 달라졌지만 저희 큰 누님이 캐나다교민인데 처음 캐나다 가셨을 때 가장 신나는 일이 우족牛足을 정육점에서 그냥 버리더래요. 우리는 우족 잘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안 먹으니까 그냥 버리는 거죠. 산에 도토리가 널려 있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더래요. 한국사람들은 그 도토리 따다가 묵도 해먹고 국수도 해먹고 하잖아요. 우리 편에서는 그 사람들이 이상하고, 그 사람들 편에서는 우리가 이상하죠. 이와 똑같습니다. 세상의 편에서는 권리를 찾는 것이, 1등 하는 것이 옳은 일이죠. 남을 위하고, 남을 돕고, 자신의 것을 드려 남을 먹이는 일은 이상한 일이구요.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반대죠. 사랑하고, 용서하고, 봐주고, 안아주고, 같이 울어주고,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평범한 일이죠. 경쟁하고 비교하고 자신을 챙기는 일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이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자들이 되죠.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는 왕관이 화려할지 모르지만 천국에서는 필요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친히 역사하시며 돕는 사람은 왕관을 쓴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2,000년전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자신의 과오나 잘못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셔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세상 모든 보화보다 귀한 분이 왕관이 아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준 왕관 쓴 군주가 아니라 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그분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가세요. 사회적인 존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곳을 가세요.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로 가세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로 가세요. 크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작고 소외된 작은 자에게 가세요.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고귀한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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