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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2]고귀한선택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마태복음 26:36~39,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위인 가운데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처럼 다재다능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 불리며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한 아름다운 의사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의사이기 이전에 그는 다른 다양한 직업의 전문가였습니다. 제일 먼저 그가 얻은 타이틀은 목사였습니다.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그도 루터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얻은 타이틀은 학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진보적인 신학사조 중 하나인 역사적 예수Jesus Seminar에 대한 연구를 그 당시에 공부하여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은 천재학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의사인 동시에 목사였고, 신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였던 것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정도로 깊은 음악적 재능을 보였는데요. 그 재능은 그저 오르간을 연주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음악가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를 연구하여 책을 펴낼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초에 오르간 제작의 혁신적인 변화Orgelbewegung가 있었는데,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오르간의 형태는 슈바이처의 영향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죠. 이처럼 의사에, 목사에, 신학자에, 철학자, 그리고 음악까지...  슈바이처는 정말 다재다능한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슈바이처박사를 의사로 더 많이 알고 있지만 그가 의사가 된 것은 이전 신학이나 철학, 음악을 공부한 그 다음이었습니다. 의학을 가장 나중에 공부했다는 것이죠. 그가 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특이합니다. 슈바이처박사에게는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좌우명 같은 인생의 목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30살까지는 학문과 예술 속에 살고, 그 이후에는 인류에 봉사하는 일을 하자”
그 래서 그는 25살에 철학으로, 26살에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목사와 신학자로 인류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29살이 되던 해, 자신의 기숙사에서 잡지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프리카의 어렵고 비참한 생활상을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놓고, 그들을 돌볼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의학공부를 마친 나이 마흔에, 아프리카로 떠났죠. 하루는 이런 슈바이처를 보고 사람들이 물었답니다.
“안락한 조국을 버리고 왜 이리 고생을 사서 하십니까?”
그때,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설교해도 소용이 없더군요.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곳에서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의술을 통해서 사랑을 베풀고, 바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박사에 대한 일화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에 그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사랑의 의술을 베풀며 인류에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아프리카를 떠나 파리로 갔습니다.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시상식장이 있는 덴마크로 갈 계획이었죠. 이 사실을 안 신문기자들이 그가 탄 기차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의 기차는 계층에 따라 기차 칸이 달랐답니다. 마치 설국열차처럼 말이죠. 슈바이처는 이미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은 귀족이었습니다. 당연히 기자들은 슈바이처를 만나기 위해 우르르 특등실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또다시 일등칸으로 몰려갔습니다. 먼저 취재를 하기 위해 경쟁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일등칸에도 역시 슈바이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이등칸으로 몰려가 보았지만 거기도 슈바이처는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허탈했습니다. 이 기차에 슈바이처가 없다고 확신한 기자들은 짐을 챙겨 떠났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기자 한 사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3등칸을 바라보았습니다. 동물들이나 짐짝들을 싣는 3등칸에 슈바이처가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자는 슈바이처를 보았습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꽉 끼어 앉아 있는, 퀴퀴한 악취로 가득한 3등칸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슈바이처 박사는 그들을 진찰하고 있었다. 놀란 기자가 슈바이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3등 칸에 타셨습니까?”


슈바이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예, 이 기차는 4등칸이 없어서요.”


악취에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다시 기자가 묻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선생님께서 어쩌자고 불편한 곳에서 고생하며 가십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잠시 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특등실의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의 원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데 있습니다. 가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죠.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때를 사람들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좋겠죠? 원하는대로 스스로 이룰 수 있으면 말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하지 못하는 일이 많을 때면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른이라는 것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 어른이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죽은 자를 깨우시고, 자연을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시죠. 그분이야 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을 다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삶은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늘 향해 계셨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 작은 동산 겟세마네에서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건 하나님과 마지막 대화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예수님의 일관된 삶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향하는 삶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믿음, 진정한 신앙이라는 말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실수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것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그 어느 누가 진정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믿음이나 신앙은 그렇게 윤리도덕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정말 깨끗하게 살았다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진정한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필요하실 때에 더 집중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내가 필요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실 때 그 때에 응답하는 반응이 신앙인 것이죠.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멋져 보이죠. 그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꼭 필요하시기에 나를 만드셨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십시오.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응답하십시오. 거기에 여러분의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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