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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숙시리즈01]이시대교회란무엇인가?

교회는 흙입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창세기 2:7~8) 

 

보이지 않는 능력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 어떤 창조물도 무엇을 사용해서 만드시지 않았지만 사람은 흙을 재료로 만드셨다. 왜 흙을 사용하셨을까? 흙에 대한 비밀은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도 맞닿아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흙의 특성을 살펴보라.

 

흙의 첫 번째 특성은 [보이지 않는 능력]이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흙속에 들어가 싹을 틔운다. 씨앗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나 그 씨앗이 흙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니다. 그 어린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많은 것을 얻고 채우며 자란다. 아무리 생명이 있어도 부모의 품을 떠나면 그 생명은 온전할 수가 없다.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부모의 품을 맛보지 못한 자녀는 상처 난 영혼을 가지고 자란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이 아니다.

 

씨앗이 흙을 만나야 생명이듯이, 자녀는 부모의 품을 만나야 생명이듯이, 모든 사람은 교회(복음)를 만나야 생명이 된다. 문제는 씨앗이 자라 맺은 열매에는 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흙을 통해 생명이 태어나지만 흙은 결코 생색을 내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의 기초이지만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렇듯 교회도 이 땅에서 겸손해야 한다. 교회가 이 땅에 생명을 심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 사명 때문에 있는 것이기에 교회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 십자가는 그 형상 자체로 능력이 아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가 녹아져 있는 사람에게서 능력이 발휘되는 것처럼, 교회도 그 자체로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녹아져, 그 사람이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복음은 능력이다. 그러나 복음은 스스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복음을 품은 누군가를 통해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복음은 늘 겸손하다.

 

오늘날 교회는 흙의 특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를 돋보이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주심으로, 먹은 우리들을 통해 그분의 말씀과 생각을 드러내셨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 보이지 않는 특성을 잃었다는 데 있다. 오히려 더 보이려는 세상의 방법을 동원하는 데 있다.

 

정화의 능력

 

흙의 두 번째 특성은 [정화의 능력]이다. 옛날에는 쓰레기들을 다 땅에 묻었다. 요즘은 환경보호라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땅이 썩기 때문이다. 땅이 회복되는 기간은 어떤 것은 50년, 어떤 것은 100년이 걸린단다. 그래서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 말을 가만히 뒤집어 생각해보면 5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땅은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종합해보면, 땅은 쓰레기를 받아 같이 썩는다. 그리고 서서히 쓰레기들을 정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한다. 흙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깨끗하면 깨끗한대로 같이 걸어간다. 더러우면 같이 더러워지고, 깨끗하면 같이 깨끗해진다. 더러움을 두려워하지도, 깨끗함에 교만해하지도 않는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화의 능력이 그것이다.

 

경계하고 대적하는 이유는 무섭기 때문이다. 비판하고 편을 가르는 것은 ‘물들까 봐’다. 그러나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은 본래 정화의 능력을 지닌 존재다. 어떤 것이든 새롭게 만드는 능력 말이다. 그 능력을 안다면 무서워할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비록 지금은 더러워지는 것 같으나 내 안에 주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끝끝내 새롭게 될 것이다. 비록 느려도, 비록 오래 걸려도 말이다. 정화의 능력은 판단의 능력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정화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판단의 능력을 동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하고, 비판하며 편을 가르려 든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과 비교인을 편 가른다. 나와 너를 편 가르고, 우리와 비(非) 우리를 편 가른다. 그리고 싸우고 짓밟으려 든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배워야 한다. 그분은 이 땅의 심판을 겸허히 따르셨고, 그분은 이 땅의 논리에 한마디도 거부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이 땅의 법에 의해 죽으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무모한 것 같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 생명,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정화의 능력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오늘 담대하게 기도하라. 비록 지금은 지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변화시킬 능력이 교회로 하여금 드러날 것임을... 

 

빚어짐의 능력

 

마지막으로 흙의 특성은 [빚어짐의 능력]이다. 나무나 철, 풀들은 빚을 수가 없다. 그러나 흙은 토기장이의 손길에 의해 빚어지는 재료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기 원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흙이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이 빚으시면 얼마든지 아름다운 그릇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재능이 없고 무가치해 보여도 우리는 흙이다. 흙은 토기장이가 빚을 수 있는 재질이다. 그분이 빚으시면 우리는 상상초월의 쓰임을 받는다. 교회도 하나님의 빚어짐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때론 하나님의 빚으심보다 세상의 흐름과 세상이 바라는 바를 지극히 따라가는 형태로 변모해가는 교회를 보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편안한 것을 대변하고, 사람들이 불편한 말들은 제어하는 형태로 세상에 최적화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각종 교회 세미나에서는 가장 편하게 예배드리는 방법, 편한 주차와 안락한 의자, 시청각의 극대화를  위한 리모델링이 주를 이룬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나를 고민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지금 교회에 시급한 문제는 세상이 디자인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디자인하시도록 바꾸는 것이다. 교회 모형의 기초가 된 성막은 하나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셨다. 사람의 편안함이나 동선, 필요한 것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디자인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하나님이 디자인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현대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디자인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거룩한 성소라고 말하면서 모든 디자인은 세상의 관점에 충실하게 접근한다.   

 

나의 삶을 내가 디자인하려 해서는 안 되듯이, 교회를 세상이 디자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필요에 따라 변화하는 교회를 꿈꾸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빚으시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그리고 그분의 손을 믿어야 한다. 이 땅의 교회가 주님에 의해 빚어지는 교회가 되길 기도하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주님에 의해 빚어지는 영혼 되기를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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