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294 - 누가 말했는지보다 무엇이 옳은지를 물으십시오.

2026. 10. 2. 05:00ㆍ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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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6~9   그런데 바울이 그들의 한 부분은 사두개파 사람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파 사람인 것을 알고서, 의회에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바리새파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니,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회중이 나뉘었다. 사두개파 사람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데, 바리새파 사람은 그것을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바리새파 사람 편에서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서, 바울 편을 들어서 말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10월의 첫 금요일이네요. 한 주 동안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가을 하늘이 높고 맑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도 그렇게 맑아지면 좋겠습니다. 누구 편인지보다 무엇이 옳은지를 보는 눈 말이죠.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공정한 말로 관계를 살리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어제 우리는 바울이 대제사장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오늘 바울의 변론은 뜻밖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누가는 바울이 의회 안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입을 열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고, 의회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함께 있었습니다. 두 분파는 특히 부활과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은 두 분파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때문에 두 분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죠. 이유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활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가 부활에 대해 인정하는 것에 비해 사두개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죠. 바울은 자신의 말이 논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다만 뒤이어 벌어진 격렬한 충돌까지 의도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의회 자리는 어느덧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싸움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의 싸움으로 번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바리새파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바울을 옹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조금도 잘못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죽일 듯 달려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호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었고, 그들이 지킨 것은 바리새파의 교리였죠. 그럼에도 단지 부활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바울을 자신들과 같은 '내 편'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의 모든 행동이 갑자기 정당해진 것입니다.

저는 이 기막힌 반전을 보며 우리 인간의 연약하고도 추악한 내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나 사실관계, 혹은 옳고 그름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내 편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진영 논리만이 무섭게 작동하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객관적이고 충분히 판단한 뒤에 편을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편을 먼저 정해놓고, 그 편이 옳다는 이유를 나중에 끼워 맞출 때가 훨씬 많죠.

심리학자 제프리 코언의 2003년 연구가 이를 아주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에게 특정 복지 정책을 평가하게 하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입장을 미리 알려주었더니, 정책의 세부 내용보다 자신이 속한 정당의 입장이 사람들의 판단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용 자체를 평가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소속된 집단과 편 가르기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거칠게 말하면 "오죽 답답했으면 저럴까"라며 두둔합니다. 하지만 평소 불편하던 사람이 똑같이 말하면 "원래 저런 사람"이라고 비난하죠. 똑같은 행동인데도 '누구의 행동인가'에 따라 판단의 잣대가 달라집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같은 적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한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통의 적이 있다고 서로의 주장이 옳아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습관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막았다고 보고하죠. 그가 자기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요한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선한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편인가만 물었죠. 그때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공자도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는 두루 어울리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두루 어울리지 못한다'

신앙의 성숙은 내 편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진실 앞에 서는 정직함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같은 말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했다면, 나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 편의 잘못을 알았을 때, 나는 바로잡으려 할까, 감추려 할까?'
'혹시 나는 상대의 옳음을 인정하는 것을 패배처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상대의 옳음을 인정한다고 내 존엄이 작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편의 잘못을 지적한다고 그 사람을 배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해 보시길 권합니다. 누군가의 말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전에 잠시 멈추십시오. 누가 말했는지에서 시선을 옮겨 그 말의 근거를 확인하십시오. 내 편의 잘못을 변명하고 싶어진다면, 상대편에게도 같은 변명을 허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 가운데 옳은 부분 하나를 찾아 소리 내어 인정해 보십시오.

누가 말했는지보다 무엇이 옳은지를 묻는 사람이 편 가르기의 벽을 넘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과 귀가 진실에 충실하여,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화해의 길을 여는 하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https://youtu.be/HOxKk5W8S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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