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183 - 침묵하지 마세요.

2024. 12. 15. 13:27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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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8:40~48   예수께서 돌아오시니, 무리가 그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야이로라는 사람이 왔다. 이 사람은 회당장이었다. 그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자기 집으로 가시자고 간청하였다. 그에게 열두 살쯤 된 외동딸이 있는데, 그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데, 무리가 예수를 밀어댔다.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는데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쳐주지 못하였다.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예수께서 물으셨다.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이 모두 부인하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오늘 본문은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를 보면 좀 이상합니다. 제가 자주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이상하다고 언급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 속에서 메시지를 찾는 작업은 간단치 않죠. 그런데 그 출발은 질문이라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죠. 말씀을 읽으면서 질문을 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고 언급한 것은 그 질문이 제 안에 생겼다는 의미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의 처음 시작은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어느 순간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로 바뀌죠.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리고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다시 이어집니다. 이 전개가 좀 이상해요. 만약 사건별로 이 이야기를 풀었다면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를 나눠서 말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뒤섞어 놓았을까요? 

 

혹시 지금 저의 의문에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문이죠. ‘이게 뭐가 이상하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글을 전개한 것 아닌가?’라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시는 도중에 혈루병 여인을 만난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하나 없죠.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꼭 시간별로, 연대기별로 철저하게 사건을 나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나열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렇게 전개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야이로의 딸을 고치려 가는 도중에 또 다른 사건이 끼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가 없다면 굳이 사건 사이에 또 다른 사건을 꼭 끼워 넣을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끼워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려운 신학적 질문을 드리는 것이 아니죠? 이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충분히 질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읽는 데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책과 가까워지지 않고 성경을 읽는다고 성경이 쉽게 이해된다고 믿는 것은 망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태껏 기도하지 않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죠. 시쳇말로 사람이 서로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도 그 사람의 말투와 성향, 말의 전개들을 이해해야 가능하기도 하죠. 처음 만난 사람이 서로의 방식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말하는 단어의 정의, 생각하는 개념 등이 서로 다르면 같은 말을 해도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들을 귀를 가지고 있을까요? 한 번도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는데 말이죠. 우리가 말씀 묵상을 매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영적인 관습 때문이 아닙니다. 마치 하루에 세 번 절을 해야 복이 달아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처럼 큐티나 묵상을 하지 않으면 하루가 잘못될 것 같은 그런 빗나간 믿음으로 절차를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말씀을 읽는 방식,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을 익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의 방식을 익히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왜 이런 전개가 필요했는지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의 시작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죠.

 

누가복음서8:40   예수께서 돌아오시니, 무리가 그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뜬금없이 거라사에 가셨죠.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이 거라사에 가신 이유는 단지 ‘한 사람’ 거라사의 광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이 장면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을 담은 스토리라고 말씀드렸던 것을 말이죠. 출애굽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밑그림이었던 것처럼, 거라사 광인을 찾아가시는 장면은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요약한 모습입니다. 풍랑을 뚫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는 장면은 마치 십자가의 부활을 의미하는 요나의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거라사의 광인은 소위 죄인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우리들의 모습이죠. 그 죄인을 살리기 위해 돼지 떼가 죽는 모습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돌아오시죠. 딱 그 사람만 만나고 오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무리들이 환영하죠. 기다렸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기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바로 회당장 야이로의 열 두 살 난 딸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그 소녀를 만나시고자 돌아오신 듯 보이죠. 그렇게 이야기는 물 흐르듯 흐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혈루증 여인이 등장하죠. 이렇게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 야이로의 딸 스토리 중간에 끼어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거라사 광인처럼, 야이로의 딸처럼, 주님께서 가시고자 계획된 일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서8:45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과연 예수님이 모르셨을까요?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읽으시는 주님이 주님 근처에까지 와서 옷을 잡은 여인을 느끼지 못하셨을까요? 저는 그런 의미보다 훨씬 강력한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등장이 예측된, 그러니까 주님이 계획하시고 일하시고자 하는 일정을 뛰어넘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는 거죠.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더 강력한 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서8:46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께서 행하시지 않은 능력, 좀 심하게 말하면 당신이 원하시지 않은 능력이 행해진 사실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도 모르게 능력이 행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는 재산을 탕진할 만큼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병을 고칠 수 없었던 그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고침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한 것들이 숨어 있어요. 성경은 그녀가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이 12년은 앞서 야이로의 딸이 12살인 것과 연결이 되죠.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은 정말 귀중한 자녀였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딸을 꼭 살리고 싶었을 거예요. 그것과 동시에 12년간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는 귀한 아내였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녀의 나이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만약 그저 그런 아내였다면 그녀는 쫓겨났을 거예요. 특히 혈루병과 같이 당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그랬을 테죠. 게다가 오늘 본문은 한술 더 뜨죠.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다고까지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여인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학자들 가운데는 그녀가 고귀한 집의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를 해 본적이 없을 거예요. 귀족이면 귀족일수록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귀족의 체면만으로도 혈루병을 드러낼 수 없었을 테죠. 그런데 오늘 그녀가 직접 나섭니다. 체면도 내려놓고요. 부끄러움도, 무서움도 다 내려놓고 예수님  곁으로 나오죠. 

 

지난주일 다림교육 감사의 밤을 이곳 교회에서 가졌습니다. 수서에서 이곳까지 먼길을 많은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교회 가족들이 차량으로 실어나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함께 참여하여 응원해 주시고 후원과 봉사를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그날 왠지모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행사는 예년처럼 진행되었습니다. 특별히 지금 대학생들이 시험기간이라서 많은 이들이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상편지로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 영상 편지를 보는데 뭉클했어요. 저 학생들이 정말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자기와 상관도 없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 일에, 단지 그 일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나마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믿음으로 헌신하는 그들이 영웅처럼 보였습니다.

 

역사는 천재지변과 같은 커다란 사건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단지 누군가 작은 행동, 작은 희생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죠. 기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의 작은 마음이 모아져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능력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작은 행동에서 이루어집니다. 자발적인 순종에서 이루어지죠.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 중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누군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던 그녀의 병 고침이, 이제 자신의 손과 발로, 자신의 행동으로 이루어내는 믿음과 순종의 이야기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 정치적 상황이 심각합니다. 되도록 정치적인 문제를 설교 시간에 다루지 않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한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견해는 진영의 문제도, 좌우의 문제도 아닌 진리와 정의의 관점임을 이해해 주시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84학번입니다. 그때까지 산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독재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려서도 아닙니다. 독재국가였지만 정치를 잘해서 제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아니에요. 제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1980년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엄군의 총에 희생되는 참극이 벌어졌을 때도 저는 몰랐습니다. 그저 방송에서 말하는 데로 그들이 다 폭도들이고 간첩들인 줄 알았죠.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가 몰랐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조금씩 사회의 눈이 열리고 객관적 진실의 정보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접하면서 저의 무지에 대해, 그리고 남 일처럼 살아왔던 시간에 대해 깊은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 내가 평범하게 생각하는 이 일상이 결코 저절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누군가가 앞서 불의를 막고, 누군가는 무력에 희생되며 조금씩 만들어진 자유라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부채 의식이 몰려왔습니다. 대학교 2학년이 되던 때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성령의 체험을 했고 주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결단 이후 저의 참여의식은 더욱 커졌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사회 운동을 하거나 그 당시 유행하던 운동권 활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1987년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 저는 서울역 고가 위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 서 있었습니다. 북한을 위해 기도할 때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음성에 번뜩 손을 들고 자원해서 떠났습니다. 그 일로 저와 제 아내는 큰 트라우마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데,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같은 피를 나눈 동포로, 회피하고 눈감고 도망치며 남이 만든 자유와 평안에 기대어 사는 내 자신을 보는 것이 훨씬 더 큰 후회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6년 광화문에서 천만의 시민들이 모여 목소리를 높일 때도 저는 그저 내 작은 목소리 한 줌을 그 거리에 뿌렸습니다. 나도 이 땅의 시민이고 미래 세대에게 이 나라를 물려줄 책임 있는 기성세대였기 때문입니다. 2시간 만에 끝난 내란을 보며 누군가는 웃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저절로 실패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가 편안하게 예배할 수 있는 것도 그날, 그 밤에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국회로 달려가 장갑차 앞에 드러눕고, 군인들 앞에 맞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저 따뜻한 방에 앉아 양비론에 숨어서 시시덕거리는 비겁한 존재들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저의 이야기가 불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각자의 이념과 사상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념이든, 그 어떤 사상이든, 그 어떤 철학이든, 무력과 폭력은 안 됩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무력도 폭력도 하나님 앞에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력을 같은 편이라고 옹호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지 마세요. 믿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믿음은 나의 손과 발로, 내가 직접,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내 마음의 그릇을 만들어야 하고 그 은혜를 담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을 상태로 만들어야 하죠. 그렇게 내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 행동이 주님의 기적을 가져오고, 그분의 능력을 이끌어요. 그 행동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이 많은 법이에요. 믿음의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왈가왈부합니다. 행동하세요. 직접하세요. 나의 손으로 문을 여세요. 침묵하지 마세요. 주님 앞에 우리의 발로 찾아가고, 우리의 손을 내밀 때 그 믿음이 기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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