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6. 04:45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 8:49 예수께서 아직 말씀을 계속하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세상은 흔들리고 어지러울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소망이 가득한 채로 웃음과 기대를 품고 시작하시길 빕니다.
어제 우리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에서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로 변한 본문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두 사건이 뒤섞인 이유와 혈루병 여인을 통해 주시는 능동적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나눈 바 있죠. 그리고 오늘 다시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돌아오죠.
오늘 본문은 짧은 구절이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이중성을 엿볼 내용들이 많이 있죠.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죠.
"예수께서 아직 말씀을 계속하시는데..."
이는 예수님에 행동에 대한 반감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가고 계신 중이었죠. 예수께서 거라사에서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이유는 야이로의 딸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도중에 혈루병 여인을 만나죠. 이는 결국 발걸음을 지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야이로의 딸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죠. 아마도 야이로 집안의 사람들에게는 혈루병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예요. 자신들의 급한 마음을 방해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는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혈루병 여인을 붙들고 미주알고주알 응대해 주시는 주님이 곱게 보였을 리가 없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아픔에 대해 둔감합니다. 나를 위해 남이 아프든 말든 상관을 하지 않게 되죠. 이것을 이기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기심은 둔감한데 그치지 않아요. 남의 아픔이 해결되는 것을 오히려 좋게 보지 않습니다. 마치 내가 잘되야 하는데 방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기심은 남의 아픔을 밟고 그 위에서 자신의 잘됨을 보고자 하는 폭력으로 자라나죠.
어쩌면 그 자리에 있던 야이로와 관련된 사람들은 조급함에 분노가 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와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딸의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하죠.
"따님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히지 마십시오."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그렇게도 귀한 당신의 딸이 숨을 거두었으니 이제는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정중해 보입니다만 사실 이 말속에는 여러 감정과 의도들이 섞여 있죠. 일단 이들은 예수님을 병 고치는 도구로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정도로 본 것이죠.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면 소용없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게다가 서두르지 않았던 예수님에 대한 원망도 섞여 있죠. 이는 베다니 사람 나사로의 죽음에서 드러난 마르다와 마리아의 태도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야이로의 사람으로 있었다면 혈루병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장면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내 가족, 내 딸, 내 피붙이를 위해 주님을 초대하여 모시고 가는 그 길에 다른 이가 끼어들어 시간을 지체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드셨을 것 같으십니까? 혈루병 여인의 간절함이 보였을까요? 그녀의 아픈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그녀가 싫지는 않았을까요? 방해하는 존재로 여기지는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남의 축복에 관심이 없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에 관심이 없죠. 오직 자신이 잘 되어야 하고, 자신만이 이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늘 남과 비교하죠. 남보다 먼저여야 하고, 남보다 우선이어야 하며, 남보다 나아야 합니다.
만일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했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만으로도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축복했다면 그들은 자신도 그 축복 아래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놀라운 기적에 함께 기뻐할 줄 알았다면, 비록 시간이 지체되어도,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 놓일지라도, 주님이 원하시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을 테죠. 그런데 우리는 남이 잘 되는 일에 축복하고 축하할 마음이 없죠. 오히려 남이 잘 되는 것이 나에게는 해가 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남이 잘 되는 일은 나에게는 기회가 사라지는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로섬 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남이 잘되면 내가 잘 될 확률이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축복하는 일은, 나에게도 그 축복이 임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나에게도 그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주님은 남을 낫게 여기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그 사람보다 내가 못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은 주님이 높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생명을 귀히 여기세요. 그것이 나의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축복하세요. 그것이 나에게 임할 축복을 지키는 일에요. 남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때 나의 아픔도 치유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양보한다고 손해보지 않습니다. 남에게 먼저 길을 내어준다고 뒤처지지 않아요. 남을 대접하고, 남을 높이며, 남의 잘됨에 축복하는 자는 그보다 더 큰 대접을 받습니다. 오늘도 그 놀랍고 신비한 축복이 여러분 가운데 흐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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