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 04:45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 3:3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2024년의 반을 지나 새로운 하반기를 시작했습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지만 또한번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우리는 뒤돌아보며 아쉬움에 방점을 찍을 때가 있죠. 그것을 후회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후회가 아니라 회개를 합니다. 회개는 아쉬움이 아니라 새로움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새롭게 되기 위해 회개를 하는 거죠. 그렇게 지난 6개월은 남은 6개월의 자양분으로 삼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짧은 구절입니다만 제게 주시는 말씀은 한보따리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이야기를 드디어 시작하죠. 어쩌면 그 사역의 총체적 의미를 집약해서 한 문장으로 적어 놓은 것이 오늘 본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짧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문장으로 제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에요. 물론 이어지는 본문에서 더 깊은 말씀들을 나눌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저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개괄적인, 그러나 우리가 꼭 다시 짚어 보아야 할 의미들을 몇 가지 나눠서 함께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 마음의 문을 두드린 첫 번째 문장은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였습니다. 지금 누가는 세례 요한의 사역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첫 일성이 바로 이 문장이에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주 사역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단강은 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 사해까지 흐르는 강입니다. 이 강은 협곡으로 형성되어 흐르는데요. 그 주변이 대부분 광야로 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 살면서 요단강에서 사람들을 만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를 주는 사역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단순히 세례 요한이 어디서 사역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이 문장에 저의 마음이 꽂힌 이유는 '찾아가서'라는 말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 주변 어떤 지역을 두러 다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직접 제발로 '찾아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저만의 문제일까요? 사역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아니, 적어도 어쩔 수 없다면, 그것을 해야 한다면 그것을 자신이 직접,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기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사역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끌려다닐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할 것인데 우리의 기억에는 늘 '어쩔 수 없어서',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하는 수 없이'라는 말들로 가득채워져 있죠. 그래서 늘 찜찜하고 시원치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첫 장에서 이렇게 말하죠.
요한복음서 1: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는 믿음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영접이라는 단어를 쓰죠.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발적인 것을 의미하죠. 그러니까 영적 변화의 첫 발걸음은 수동적인 자세에서 능동적인 자세로의 변화입니다.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로의 변화죠. 믿음의 변화는 이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약간의 언어유희적 발견을 했는데요. 위 요한복음 본문의 전절인 11절에는 어떤 구절이 있는 줄 아세요? 우리는 너무나 유명해서 요한복음 1:12만 기억하죠. 1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서 1: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오셨다'라는 단어의 원어가 오늘 본문 '찾아가서'의 원어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하나님의 적극성과 우리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거죠.
적극적이라고 하니까 거부감이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성격 자체가 소극적인 분들이 계시죠. 우리 공동체처럼 부끄럼이 많고 조용한 분들은 대부분 적극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죠. 어디를 찾아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에너지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힘든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그런 성격을 바꾸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죠. 우리는 각자 알맞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주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란 일부러 해야 할 일, 내 에너지를 넘어서 해야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오늘 주어진 나의 시간 속에서, 오늘 주어진 나의 환경 속에서 그 시간과 상황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인 거죠. 적극적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과도하게 해석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내 범위, 내 상황을 뛰어넘는 것을 적극적이라고 말하죠. 내가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넘어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면 사람은 탈진합니다. 쉽게 번아웃이 되죠. 저는 적극적이라는 말을 과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강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흐릅니다. 작은 강물은 작은 강물대로, 큰 물줄기는 큰 물줄기대로 최선을 다하죠. 그래야 이치에 맞고 그래야 조화를 이룹니다. 저는 이 최선이 바로 적극적이란 말을 가장 적절하게 해석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역할은 다 다를 수 있어요. 할 수 있는 분량도 다 다르죠. 그것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이루었는지, 어떤 결과를 내었는지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그 역할에 충성을 다했는지, 나의 작은 분량을 기쁘게 채웠는지를 보시죠. 그것이 적극적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가 어떤 것이 선한 삶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사실 선한 삶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나름의 대답은 있죠.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지금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내 눈에 쓰레기가 보이면 그것을 치우고, 내 눈에 도울 일이 보이면 마땅히 돕고, 내 눈에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고 내가 하는 것, 그것이 선한 삶이라고 말이죠. 그것이 적극적인 삶이고 그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다른 것은 바로 그 적극적인 삶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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