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50 - 먼저 걱정과 선을 그으세요.

2024. 5. 28. 04:45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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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2:46~50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라서,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감동과 감사에 휩싸인 하루 되시길 빕니다.

 

자녀를 잃어버리고 3일이 지나서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인지는 상상만으로도 짐작이 갑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일들이 벌어지죠. 아마도 예전에는 그런 일이 훨씬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이렇게 낯선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죠. 게다가 당시 가장 붐비는 대도시 예루살렘이라면 찾는다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찾았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말이죠.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던 거죠. 당시 유월절이 되면 각지에서 온 랍비들이 성전에서 말씀과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토론의 장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아마도 메시아사상에 대한 토론도 이루어졌겠죠. 거기에 12살 소년인 예수님이 껴서 함께 토론하고 있었던 거죠. 이 장면을 본 부모는 한편으로는 안심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왜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속이 타들어가는 걱정과 간절함을 해소하는 순간, 찾았다는 기쁨보다 화부터 내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어머니 마리아의 말은 다분히 그 화가 깃든 발언이죠. 혹시 등짝 스매싱은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예수님의 반응이 등장하죠. 3일 동안 소년 예수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어디서 자고 어디서 먹었는지 궁금하지만 지엽적인 일이니 넘어가기로 하죠. 다른 의미로는 소년 예수도 길을 잃고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부모님이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그 성전에 머물렀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극적인 상봉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뜻밖의 반응이 우리를 어이없게 만듭니다.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말에는 뉘앙스가 중요합니다. 어떤 투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분위기로 이야기했는지에 따라 그 말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투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 자체로는 자녀로서 하기 힘든 말이죠. 왜 찾다니요? 자녀를 잃었는데 당연히 찾지 않겠습니까? 

 

이런 당연한 의아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 본문이 기록되었는가입니다. 이미 어제도 그런 방식의 묵상을 나눴죠.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등장한다면 그 의도를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 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실까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이런 장면이 등장했을까?를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떠오르는 다른 본문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을 때의 장면입니다. 물론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어머니를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이적은 예수님의 첫 이적 사건으로 기억되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 또한 누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첫 일성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은 다들 아실 거예요. 혼인 잔치에는 포도주가 끊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죠.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요한복음서 2:4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자여'라는 말도 이상하고 '상관없다'는 말도 이상하죠. 그리고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이적이 행해집니다. 이 장면은 저만 이상한가요? 왜 굳이 이런 말을 써야 했을까요? 

 

여기에 제 묵상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계시죠. 그런데 그전에 예수님은 분명한 선을 하나 긋고 계십니다. 그것은 걱정의 선이에요. 본문을 톺아보면, 예수님은 어머니와 선을 긋습니다. 이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 하늘과 땅의 관계를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선을 긋는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에서 그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의미하죠. 그런데 더 깊은 의미로는 어머니의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걱정과 선을 긋고 있죠. 그리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드리기 전에 이 말씀은 때가 되면 그 걱정은 사라진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찾고, 그분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삶에 임하기를 바라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믿고 나의 걱정을 벗어 버리는 일입니다. 내 안에 있는 염려와 선을 긋는 일이죠.  오늘 본문도 이런 의미로 생각하면, 걱정을 벗어던지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아버지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거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먼저 걱정과 선을 그으세요. 걱정에 사로잡히면 한 치 앞도 나갈 수 없습니다. 걱정이 앞을 가리면 주님의 계획을 볼 수 없어요. 믿음이 사라지는 이유는 걱정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걱정이 내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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