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21. 06:31ㆍ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10:16~22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육신 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그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은 무엇이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귀신과 친교를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바울은 음식에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이미 말한 바 있죠. 제사 음식이라도 그것이 무슨 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에 어떤 의미를 두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했어요. 아무리 같은 음식이라도 내가 어떤 의미로 이 음식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런 것일까요? 똑같은 음식인데 내 기분에 따라, 내 몸 상태에 따라 음식이 체하기도 하고 영양가가 넘치기도 하죠.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한 부류는 제사 음식을 극도로 싫어하며 멀리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가족 간의 관계가 깨지고 이웃과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사와 같은 경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절하는 것을 우상으로 간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절을 하지 않죠. 그런데 그것을 문화로 보고 예나 효로 간주하는 어른들에게는 지나친 편견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그것이 갈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절을 하건 안 하건 자신의 머리에서는 그 절에 의미를 두는 경우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똑같은 음식인데 거부감이 있는 경우는 이미 그 음식에 의미를 부여한 경우이기 때문이죠.
또 한 경우는 아무 문제없으니 제사 음식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부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가 어때서? 뭐 이런 부류였을까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시에는 영과 육을 구분하며 육체가 어떤 모습이든 영적으로만 온전하면 된다는 식의 사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런 사상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죠. 그래서 이런저런 신의 제사에 참여하고 음식을 먹으며 춤추는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바울이 열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자랐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사상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자유를 얻은 사람처럼 보여요. 그래서 그의 신학에는 넓은 가능성을 제시하고 많은 것을 포용합니다. 편협한 율법주의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죠. 그러나 그에게도 단호함이 있는데요. 그것은 일관성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함을 그는 강조하죠. 모든 길이 열려있지만 그러나 가는 길에는 일관된 목표가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일관성에 대해 말씀하는 듯해요. 바울은 우리가 성찬에 참여한 사람임을 상기시킵니다. 성찬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분의 생각과 계획에 우리로 함께 함을 선언하는 표현이죠. 내 감정과 느낌, 생각과 미래를 주님과 함께 나누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는 모든 음식이 가능하지만 내가 주님의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인생이 가능하지만 내가 가기로 한 인생을 선택한 것과 같죠. 넓은 의미로는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로 나눌 수 있겠지만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죠. 그 안에서도 여러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사도로, 어떤 이는 선지자로 살듯이 우리의 사역에도 여러 사역이 있죠. 어떤 이는 지도자로, 어떤 이는 섬기는 자로, 그저 평범한 가족으로, 사회인으로, 그렇게 빛도 이름도 없이 주의 일을 하는 자로 우리에게 맡겨진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 길에 일관성이 있다는 거죠. 아무리 큰 일을 하려고 해도 일관되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가 일관된 삶을 산다면 그 일은 아름다운 일이 되죠. 일관된 삶은 놀라운 능력입니다.
오래전, 어떤 지인으로부터 체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건강 문제로 고생하던 제게 말씀해 주신 것인데요. 이게 참 신기했습니다. 체질별로 먹는 음식이 다르다는 거예요. 어떤 이들은 채식을 주로 해야 하고, 어떤 이들은 육식이 맞다는 거죠. 그런데 반대로 먹으면 건강에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 말에 많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 체질에 안 맞는 음식 중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죠. 아쉬운 마음에 가끔 먹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웃으시며 가끔은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다음 말이 제게 꽂혔습니다.
"무엇을 해도 건강은 일관성이 제일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먹어도 나쁜 것이 섞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좋은 약을 먹어도 다른 나쁜 것과 혼용하면 약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래요. 전부 다 잘해 놓고는 마지막 하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치는 경우들이 있죠. 잘 참다가 하나를 못 참아서 참았던 모든 과정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진짜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일관성이 필요하죠.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것이 제일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관성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집중하는 일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겨울 내내 밖에 두었던 화분이 있어요. 잎이 다 떨어지고 얼어 죽은 것 같은 화분이었습니다. 그래도 때때로 지속적으로 물을 주었어요. 가망성을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 주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싹이 났어요. 그것도 한꺼번에 줄기 전체에서 말입니다. 그 작지만 푸릇한 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일관성 있게 운동합시다. 내게 건강이 찾아올 거예요. 일관성 있게 웃으세요. 행복이 찾아올 거예요. 일관성 있게 좋은 생각을 하세요. 친구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일관성 있게 내 감정을 추스르세요. 원하는 일들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게 오늘도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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