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32 -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립시다.

삼하 24:1~4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그래서 왕은 데리고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지시하였다. "어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여서, 이 백성의 수를 나에게 알려 주시오." 그러나 요압이 왕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의 주 하나님이 이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 불어나게 하여 주셔서, 높으신 임금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높으신 임금님께서, 어찌하여 감히 이런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까?" 그러나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이 더 이상 왕을 설득시킬 수 없었으므로,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이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떠나갔다.


이제 사무엘서의 하권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묵상한 횟수를 보면 오랜 시간 동안 사무엘서를 묵상했네요. 제게는 개인적으로 많은 통찰력과 확신을 준 말씀들이었습니다. 하루하루 묵상할 때마다 기대와 감사로 채워진 시간이었죠. 이제 24장을 끝으로 2021년도 마무리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의문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궁금한 것들도 많고 이해가 필요한 것도 있죠. 그 의문점들을 나열하자면 이렇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왜 이스라엘에 진노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부추기셨다는 말씀도 마음에 걸리죠. 하나님께서 다윗을 시험하시고자 덫을 놓았다는 의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구조사가 왜 그리 큰 죄일까? 도 의문이죠. 이렇게 많은 의문점을 낳는 것은 그만큼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추론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정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유추는 가능할 거예요.

 

일단 위의 의문점들은 서로가 얽히고설킨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인구조사에 관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죠. 인구조사가 왜 문제가 될까요? 말 그대로 하면 인구센서스인데요. 우리들도 몇 년에 한 번씩 하는 일이죠. 그렇게 통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의 미래를 계획하고 수립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죠. 이런 것이라면 뭐가 문제가 싶습니다. 모세도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죠. 민수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인구조사를 한 목적은 법궤를 운반하기 위한 일이었죠. 그런데 아마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구조사는 일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는 군사력에 사용되는 장정들의 수를 확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군사력이 얼마나 되나? 하는 의미의 조사였던 셈이죠. 그래서 군 사령관이었던 요압을 시켜 조사에 임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게 인간의 교만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힘, 군사력, 병력을 더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솔로몬 시대 나라가 갈라지게 된 동기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군사력을 믿고 의지했던 것 때문임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갑자기 군사력을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여기서 심각한 의문점이 제기되죠. 바로 이를 하나님께서 부추기셨다는 구절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시고, 또 그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비교적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 본문인 역대상 21장을 보면, 같은 본문이 나오는데요. 거기서는 다윗을 부추긴 존재가 사탄이라고 나와 있네요. 분명 다윗의 실수는 순간적인 판단 착오이자 잘못된 생각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죠. 오늘 본문이 그런 문학적 표현으로 적힌 것이라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점차 전체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단의 중심인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에 대해 생각해야 할 시간이죠.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어떤 문제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분명히 들추시고 우리에게 알려주시며 또 끊어내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자!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점이죠. 보통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실수를 우리는 조용히 덮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무도 몰랐으면, 어떤 들춤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죠.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고마워합니다. 창피를 당하기 싫고 바닥으로 떨어지기 싫어서죠.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신 것 같아요. 우리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는 모른척해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 새로운 시간이 가능하고, 내 나쁜 습관을 버려야 좋은 습관이 들어오기 때문이죠. 마치 제로섬 같습니다. 내 안에 두 마음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듯이 하나는 버려야 다른 하나가 살죠.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돌아섬이 필요한데요. 그 전제가 바로 그 죄에 대한 평가입니다. 보통 심판이라고 하죠.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벌은 상해가 아니죠. 오히려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렇게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랑이죠.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 진노하신 그 부분이 바로 반란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압살롬의 반란, 세바의 반란 말이죠. 이 반란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나라가 갈라질 만큼 큰 동요가 있었죠.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생각과는 먼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다윗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했죠. 여기에는 자신들의 숫자를 과신한 잘못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고 하나님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힘으로, 다수의 숫자로 하나님과 대적하려는 모습을 보였죠. 아마도 이에 대한 분명한 지적이 없다면 이 일은 언제고 다시 반복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냥 덮고 넘어간 죄들이 소멸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이제 의문점들이 조금 해소되었나요? 그와 동시에 오늘 주시는 말씀도 새겨보시죠. 저는 이렇게 제목을 정하겠습니다.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리자고요. 어제 주일 공동체 예배 말씀에서 그런 말씀을 나눴죠?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뿐이어야 한다고요. 진정으로 원하는 것만 기도하고 생각하고 가슴에 품자고요. 바람은 얻는 것이면서 마음과 느낌으로는 못 얻을까 불안해하고 불만의 감정을 갖는 것은 두 마음이라고 말이죠. 그렇게 두 마음을 품으면 내가 진정 바라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입니다. 정말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 말하고, 생각하고, 품으세요. 내가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일인데 괜히 마음에 남겨두지 마세요. 그렇게 기도를 방해하도록 곁에 두지 마세요. 마음을 정했으면 다른 것은 잘라 버리세요. 잘못은 버려야 잘함이 머뭅니다. 거짓은 버려야 참된 것이 임하고요. 불안과 불만을 거둬야 기대와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버릴 것은 버리고 시작하는 오늘이길 빌어요.

 

이제 오늘 일어나 제일 먼저 할 일은 어제의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어제 가졌단 기분과 감정은 버리고 새롭게 주시는 은혜의 감정으로 시작합시다. 얼굴에 미소를 띠세요. 굿모닝! 인사도 좋겠군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요. 그러면 어때요? 그런 시선 때문에 나의 감정을 새롭게 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잖아요? 남이 뭐란들 그게 뭐가 그리 대수입니까? 내가 새로워지겠다는데... 그렇게 새롭게 오늘을 시작하세요. 곧 오늘이 쌓여 복이 되는 여러분이 될 것을 믿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