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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34 - 멀리 보세요.

삼하 24:11~15   다윗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 다윗의 선견자로 있는 예언자 갓이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 "너는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내놓겠으니, 너는 그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처리하겠다.'" 갓이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여 알렸다. "임금님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임금님께서 왕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을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의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제 임금님께서는, 저를 임금님께 보내신 분에게 제가 무엇이라고 보고하면 좋을지, 잘 생각하여 보시고,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다윗이 갓에게 대답하였다. "괴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니,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아침부터 정하여진 때까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 가운데서 죽은 사람이 칠만 명이나 되었다.


오늘 본문은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죠? 다윗이 큰 범죄를 저지른 후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던 장면과 흡사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제가 목사여서 그럴까요? 선견자의 존재 이유가 담긴 말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가 모두 선견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 공동체로 참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통로로서 목회자를 세우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 직분과 맡은 사명이 엄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늘 주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간구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았을 개연성은 다분하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부분에 이르러서 하나님은 선지자, 혹은 선견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다윗에게 국한하자면 그것도 잘못에 대한 지적에 있어서 유독 그렇습니다. 어쩌면 내 잘못된 판단과 결정에 제동을 걸며 주님의 음성으로 돌아가는 그 기회로 목회자를 쓰시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니 목회자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공동체에서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말씀드린 적이 있죠? 우리가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일으켜 세워줄 사람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요. 나를 알아야 기도하고, 내 곁에 있어야 조언이나 위로나, 도움이나 기도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해 곁에 사람을 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몰라도 내가 흔들리고 위험할 때 나를 지탱해줄 사람을 만드는 일이 필요해요. 그것도 내가 건강할 때, 내가 여유로울 때, 내가 힘이 있을 때 만들어야 합니다. 거기에 공동체의 묘미가 있죠.

 

조금 더 묵상해 볼까요?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재앙에 대해서 흥미롭다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제겐 다윗의 어리숙함이 보이는 것 같아서 짠하기도 하고 또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그것은 다윗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갓을 통해 다윗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벌에 대한 선택권이죠. 이런 선택이 참 잔인하기는 합니다. 뭐 하나 고를만한 것이 없는 혹독한 재앙이기 때문이죠. 7년간의 흉년, 3개월 동안의 쫓김, 그리고 3일간의 전염병,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다윗은 이 셋 중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벌을 받겠다는 명목 하에 3일간의 전염병을 선택하죠. 여기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편견이 작용한 듯해요. 바로 전염병은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그런 편견이죠. 그래서 그런가요? 코로나를 놓고도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재앙이라는 견해를 가진 분들이 계십니다. 이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오늘 본문과는 다른 이야기기에 잠시 접어두기로 하죠. 아무튼 그렇게 다윗의 의미 있는(?) 선택과는 다른 생각이 저는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정말 다윗이 전염병을 하나님의 진노로 여겨서 선택한 것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제가 너무 비트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다시 질문을 드려보죠. 7년의 흉년, 3개월의 쫓김, 3일의 전염병, 이 세 가지를 다시 한번 보시죠. 그리고 다윗이 왜 세 번째를 선택했을까?를 다시 생각해보세요. 혹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분이 계신가요? 다윗이 무슨 이유를 들어 합리화한들 제게는 3일이라는 시간이 선택의 기준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흉년이나 쫓김은 이미 다윗이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가장 쉬운 선택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쉬운 선택의 대가는 치명적이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7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죠. 심지어 이 참혹한 광경에 하나님조차 후회하실 만큼 비참했습니다. 이 장면을 다윗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에는 제 양심이 찔려요. 오히려 쉬운 선택을 한 대가라는 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죠. 당장의 화를 면하기 위해 거짓말에 익숙하고, 지금을 회피하기 위해 짧을 지혜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는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그 화가 나를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죠. 그래서 피하고 보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끝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어려움이 있든 끝은 해피앤딩임을 안다면 무서워할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하죠. 그래서 멀리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번의 실수로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어디 실수 없는 인간이 어딨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실수가 곧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픔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재를 화관으로 바꾸시고, 슬픔을 기쁨의 시작으로 만드시죠. 괴로운 마음을 기필코는 찬송의 마음으로 바꾸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슬픔 속에서 소망을 갖는 것, 괴로운 마음에서 찬송을 찾는 방법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멀리 보세요. 꼼수보다 대의가 더 낫습니다. 순간보다 영원이 더 귀합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습니다. 긴 호흡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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