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126 - "생각해도 괜찮아!"

2021. 7. 9. 07:02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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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7~27   다윗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서 부르고, 그것을 '활 노래'라 하여,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였다.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그 조가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이해하기 힘든 다윗의 반응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충격과 함께 슬픔에 잠겨, 애통하는 마음으로 조가를 부릅니다. 이는 그저 단지 죽음을 애도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그의 슬픔을 노래로 만들어 모든 이들에게 알리고자 했으니까요. 마치 모든 이들에게 살아생전 사울 왕의 위대함을 알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죽음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런 행동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사자에 대한 예의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우정을 나누고 생명의 은인이었던 요나단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원수로 그런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이건 그냥 미워한 정도가 아니라 혐오를 넘어 증오에 가까운, 심지어는 밑도 끝도 없는 병적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였어요. 그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다윗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울과 다윗은 공존할 수 없는 죽음의 게임을 벌였던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죽어야 다윗이 살고 다윗이 죽어야 사울이 사는 그런 관계였다는 것이죠. 그런 사울의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 치면 지금 다윗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습니다.

 

일반인인 저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하죠. 연기가 아니라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에 대한 다윗의 영성을 이미 어제 묵상했죠. 그의 마음에는 사울 개인의 존재를 넘어 하나님의 계획과 순리 가운데 사용된 존재였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죠. 이 영성이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기초이니까요. 창세기 1:1을 기억하시죠?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4마디 전제조건이 우리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분이 만드셨고, 그분이 펼쳐놓으신 시간 속에 우리가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나의 모든 시간과 역사(history) 가운데 그분이 계시고, 그분의 섭리가 있으며, 그분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시작이죠. 그 믿음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기초입니다. 그 기초 위에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져야 하죠.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오늘 본문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행동양식을 배웁니다. 굳이 부제를 붙인다면 이런 제목이었으면 좋겠네요.

 

"상처를 이기는 방법"

 

우리는 수많은 상처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픔을 당하고 그것이 기억에 남아 오랜 시간 스스로를 괴롭히죠.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봐도 우리의 뇌리에서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어 밤을 지새고, 짜증을 내며, 또 마치 학습효과처럼 다른 이들에게 상처의 씨앗을 뿌리고 맙니다. 답답한 마음에 상담을 하거나 조언을 구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잊으라'는 말뿐이죠. 생각하지 말라고,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듣노라면 마치 내가 강박증 환자가 된 것 같은 모멸감에 오히려 조언은 상처가 되기 십상입니다. 잊으라고 잊혀지면 어디 그것이 상처겠습니까? 신경 쓰지 말자 해서 신경이 안 쓰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Paradoxical effects of thought suppression)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다니엘 베그너의 이론인데요.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각나는 역설이 우리에게 있다는 이론이죠. 요즘으로 말하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로 대변되는 이론이 아닐까 싶은데요.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의 뇌에 주입하면 할수록 우리의 뇌는 더욱 그것에 주목하는 심리가 작동한다는 겁니다. 보통 우리는 "~를 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하죠. 그런데 이 '하지 마'라는 말을 뇌는 경고성 의미로 받아들여 더욱 '자주 떠올려야 할 중요한 정보'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것이 뇌에 맴도는 거죠. 제가 자녀들에게 하지 말라는 말보다 칭찬을 더 해 주는 것이 교육적 효과가 크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는 특별히 아이들이 청개구리적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우리의 뇌가 하지 말라는 것을 더욱 생각해야 하는 정보로 받아들이기 때문인 겁니다. 이는 긍부정의 반응에서도 동일하죠. 부정적인 사고는 경고의 의미로 뇌가 받기 때문에 더 많이 남는 거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떠올라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생각나는 것을 어쩝니까? 그저 내가 아팠음을, 힘들었음을 인정하자고요. 그것은 잊혀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도 괜찮은 것이라고 말해 주자고요. 비록 많이 아프고 힘든 일이었지만 생각해도 괜찮다고, 기억나도 괜찮다고요. 뇌는 괜찮다는 말을 경고가 아닌 안심의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다니엘 베그너는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뇌는 오히려 크게 중요한 정보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내 마음과 생각에서 상처를 풀어주는 것이 훨씬 잊는 것보다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상처를 괜찮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나도 괜찮다고, 떠올라도 괜찮다고 말이죠. 받은 상처는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삭제할 수도 없듯이 말이죠. 그러나 그 시간, 그 상처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있어요. 상처는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괜찮다고, 함께 살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죠. 너무 피하려고도, 너무 숨기려고도 하지 마세요. 너무 잊으려고도, 너무 중요하게도 여기지 마세요. 생각나도 괜찮아요. 말해도 괜찮습니다.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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