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8. 07:05ㆍ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하 1:1~16 사울이 죽은 뒤에, 다윗이 아말렉을 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지냈다. 사흘째 되던 날, 한 젊은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왔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써서, 애도의 표시를 하고 있었다. 그가 다윗에게 와서,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니, 다윗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그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진에서 가까스로 살아서 빠져나왔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서 나에게 알려라." 그가 대답하였다. "우리의 군인들이 싸움터에서 달아나기도 하였고, 또 그 군인들 가운데는 쓰러져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사울 임금님과 요나단 왕자께서도 전사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는 그 젊은이에게 다그쳐 물었다. "사울 임금님과 요나단 왕자께서 전사한 줄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는 젊은이가 설명하였다. "제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 임금님이 창으로 몸을 버티고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적의 병거와 기병대가 그에게 바짝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울 임금님이 뒤로 고개를 돌리시다가, 저를 보시고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그러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저더러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말렉 사람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사울 임금님이 저더러 '어서 나를 죽여 다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일어나서 사실 것 같지 않아서, 다가가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저는 머리에 쓰고 계신 왕관을 벗기고, 팔에 끼고 계신 팔찌를 빼어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문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슬퍼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울며 금식하였다. 다윗이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여 준 젊은이에게 "너는 어디 사람이냐?" 하고 물으니, "저는 이스라엘 땅에 거주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입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다윗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네가 어떻게 감히 겁도 없이 손을 들어서,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살해하였느냐?" 그리고 다윗이 부하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불러서 "가까이 가서, 그를 쳐 죽여라" 하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이 그를 칼로 치니, 그가 죽었다. 그때에 다윗이 죽어 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너의 입으로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제가 죽였습니다' 하고 너의 죄를 시인하였다."
오늘부터 사무엘하 말씀을 묵상합니다. 지난 4월 사무엘상을 마치고 석 달 만이네요. 사무엘상은 다윗과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던 또 하나의 주인공 사울 왕의 죽음을 끝으로 막을 내렸죠. 사무엘하는 이를 곧바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상의 흐름으로는 굳이 사무엘 상권과 하권으로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남지만, 어찌 보면 이는 사울의 시대와 다윗의 시대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나눔을 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다윗은 잡혀갔던 가족들을 구출하여 사글락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되죠. 그 장면이 오늘 본문에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다윗의 영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어쩌면 그의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또한 이는 고난의 하루하루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다윗에게 찾아온 어떤 젊은이 때문입니다. 그는 슬픔 가득한 표정으로 다윗에게 찾아와 사울을 죽음을 알리죠.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놀라며 더 자세한 내막을 묻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자초지종을 알려주죠. 사울이 큰 부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그 근처에 있었으며 사울이 자신을 불러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젊은이는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에 그 명령대로 사울을 자신이 죽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사울이 끼고 있던 팔찌를 보여주죠. 아마도 사무엘상 묵상을 잘 따라오셨다면 이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울이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패전을 목전에 두고 적군에 의해 죽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명예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는 고대 전쟁에 임하는 장수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죠. 그래서 부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하는 차마 자신의 상관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칼 위에 엎어지며 스스로 목숨을 끊죠. 그 부하 역시 사울을 따라 목숨을 끊습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그렇다면 이 젊은이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죠.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당시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견원지간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또한 다윗이 존경받는 후계자였다는 것과, 이를 역행하려는 사울의 부당함이 사람들 속에는 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사울은 다윗을 괴롭혔고 죽이려고 모든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죠. 이 때문에 다윗은 뜻하지도 않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죽음을 가장 기뻐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수혜자가 다윗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마치 시소게임처럼 사울의 몰락은 다윗의 부흥이라고 여겼을 테죠. 이 거짓말은 그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사울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하면 다윗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어쩜 이는 상식적인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기본적인 처세술인지도 모르죠. 그렇게 연줄을 잡고, 기회를 노리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이 처세와 술수로 왕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생사의 기로에서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자신이 죽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죠. 이는 마치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온갖 차별적 대우를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형제들에게, 또한 부모에게서조차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자랐어요. 사울에게도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온갖 부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인생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이나 싶을 만큼 억울한 일은 혼자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그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이것이 다윗의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격이 얼마나 좋으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인격적이어야 억울함에도 웃고, 부당함에도 기뻐할 수 있겠어요? 다윗은 그리 좋은 성격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천적인 정의로움을 타고나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뭘까요? 그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섭리, 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섭리란, 모든 만물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주님의 손을 떠난 것이 없다는 것이죠. 고난조차도,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는 믿음이 다윗을 견디게 한 것입니다. 그가 사울을 죽이지 못한 이유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또한 내가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고 그를 세우신 주님의 의도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죠.
시편 119편에는 주님의 법을 찬양하는 시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 시편은,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는 말로 시작되죠. 법이라는 것이 물이 흐른다는 의미입니다. 때론 어디로 흐르는지 알지 못해도, 때론 막히고 요동치고 부딪치며 구비구비 흘러도, 그 물의 끝은 결국 바다를 향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아픔이 있어요. 견디기 힘들고 복받치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은 흐르죠. 그 물속에는 기쁨도 슬픔도, 고난도 행복도, 어려움도 쉬움도, 불만도 만족도 다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처럼 높낮이의 굴곡이 있어요. 그러나 그 물은 결국 하나님의 바다로 향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고난조차도 유익임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고난이 언젠가는 분명 나에게 유익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오늘 본문의 젊은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기발한 처세술을 부렸는데 결국 그는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잠깐의 거짓이 통하지 않습니다. 한 순간의 물줄기를 뒤바꾼다고 그 끝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빠른 길은 없습니다. 정도를 걷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에요. 믿음대로 걷는 길이 가장 정확한 길이고요. 정도를 걸으며 끝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길이 열립니다. 오늘, 고난조차 유익으로 보이는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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