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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디모데전서묵상

돕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5:1-16 돕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 과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직분으로 처음 생긴 집사는 본래 과부를 돌볼 목적으로 세워질 정도였으니까요.
왜 과부가 많았을까?
이는 사별로 인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당시 사회적 제도때문입니다.
당시는 일부다처제가 성행하던 사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편으로부터 버려져 혼자가 되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사회적 약자였던 여인들은 그렇게 버려지면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여인이라는 차별뿐 아니라 결혼했다 버려진 오명으로 편견까지 더해진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것은 남에게나 가족에게나 별반 다르지 않는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들을 보살피는 일들이 주된 사역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읽다보면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과부를 돌볼 때 그들의 처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는 다림사역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희는 교육적 불균형과 상대적박탈감 해소가 사역의 출발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격차, 사회적 계층에 대한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거나 소외된 아이들만을 골라 사역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어린이는 어린이로, 모두 같은 생명으로 보는데요.
그러다보니 다림사역에는 소위 살만한 가정이든, 도움이 필요한 가정이든 모든 가정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도울 사람만 돕지, 돕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돕느냐'는 시선들이 있는 것이죠.
도울 사람을 분별하라는 주문들을 많이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도와야 할 기준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죠.
다림교육이 도와야할 아이들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만약 그 기준이 돈이 있고 없음이라면 우리는 또다른 상대적박탈감을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준은 그저 "어린아이"일뿐 입니다.
누구나의 도움이 필요한, 그런 어린 생명 말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도울 사람을 구별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3절에는 "참" 과부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참"이란 진짜라는 뜻이죠.
이 표현을 해석하자면 거짓 과부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이 말은 과부가 아닌데 과부인척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과부이기는 한데 도울 필요가 없는 과부가 있다는 뜻이죠.
11절에는 젊다는 이유로 과부를, 돕는 자의 명부에서 빼라고도 합니다.
13절에는 심지어 과부들이 도움만 받고 스스로는 빈둥거릴지도 모른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죠.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초대교회에 도와야 할 과부들이 너무 많아서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말 도와야 할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돕는 것 때문에 놓쳐서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비판적으로 읽다가 새로운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참고로, 성경은 비판적인 눈으로 읽기를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성경을 향한 여러분의 의문에 하나님은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싶은 갈망만큼 하나님은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비판적인 질문이 있다면 부여잡고 답을 찾아가세요.
의문없이 믿습니다하고 아무 갈등없이 성경을 읽는 것도 문제지만
의문을 품고도 주님께 응답을 구하며 매달리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의문이란 끝까지 답을 얻는 갈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의문만 품고 답을 찾을 갈망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부정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 의도의 단면을 14절에서 읽습니다.
14 그러므로 젊은 과부들은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다스려서, 적대자들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는 사회적으로 그저 도구였습니다.
여인의 인권이나 권리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결혼에 실패한 여인은 버려진 여인이었고,
과부는 여인 중에도 가장 천시되는 사람이었죠.
그들에게 재혼의 권리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혼, 이것은 언제나 여인의 잘못이었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쫓겨났을까?라는 편견이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단순하게 과부를 돕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과부가 소생(?)케되는 방법을 말합니다.
젊은 과부들의 재혼을 권장하는 것이죠.
이 말은 돕는다는 차원을, 단순한 차원에서 고급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가난한 자를 돕는 가장 큰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의 헌금, 우리의 도시락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난을 만드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낳는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는 그저 순응하면서, 가난을 구제하는 사역을 하는 것은 어쩌면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사회의 영향력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이 할 수 없는 것들, 사회적 편견, 구조적 모순, 전통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깨뜨려나가는 것, 그것이 교회가 갖는 영향력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교회의 영향력은 오히려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돕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오래전 저는 사랑은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시선을 바꾸는 일이죠.
이혼, 가련하고 불쌍한 시선을 버리세요.
재혼, 뭔지 모를 쉬운 인격이라는 시선을 버리세요.
오히려 힘들고 어려웠을, 아프고 고단했을 상처에 마음을 여세요.
용기와 결단, 그리고 새로운 길에 대해 박수를 보내세요.
사회적인 시선을 바꾸는 일이 가장 큰 도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사회적인 모순에 대해 함께 싸우겠다는 것이고요.
이 땅의 사회적 편견의 시선을 넘어 바꾸겠다는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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