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210 -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2025. 1. 22. 04:45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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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9:49~50   요한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일 아침이죠. 기분 좋게 시작한 한 주이지만 어느덧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하죠. 그만큼 삶은 녹녹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질 수 없죠.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섭시다.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지 않아도 그래도 지금 우리는 변화의 물결 위에 있음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는 전진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한 마디로 시작하죠. 물론 요한은 제자 요한을 말하는 거죠. 그는 뜬금없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유는 우리와 함께하는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아마도 요한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팔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가끔 우리는 명의를 도용당해 피해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팔아 수익을 챙기는 경우에 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는 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죠. 오히려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은 무슨 배짱으로 이런 말을 당당하게 했을까요? 제가 당당하게 했다는 것은 유추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만약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면 예수께 물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냐고 말이죠. 그러나 그는 이미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이후 예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쩌면 그런 자신의 행동이 칭찬받는 일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당당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왜 요한이 튀어나왔을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은 제자들끼리 서로 누가 큰 자인가를 놓고 갈등을 빚는 장면이었죠. 그렇다면 그 갈등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물론 모든 제자들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동자가 있을 법하죠. 본문에는 그 주동자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우리는 충분히 추측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례가 있기 때문이죠. 한 번은 제자 중 일부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권력을 잡으면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자리를 달라고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모사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였죠. 이를 토대로 보면 앞선 본문에 등장하는 갈등의 주인공 또한 그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나무라시자 뻘쭘했던 요한은 이를 상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뜬금없는 말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는 요한의 이기심이 깔려 있습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마음이 그의 모든 행동 양식을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그런 요한에게 변화의 불씨를 댕기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주님은 친절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공동체 안에서의 다툼은 대부분 비본질적인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한때 미국교회에서는 교회에 피아노를 놓느냐 안 놓느냐로 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하고 교단으로 갈라지는 경험도 했죠. 주님을 찬양하는 것, 예배하는 것의 본질은 그대로 두고 어떤 도구를 이용하느냐의 비본질로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들을 허물고, 함께 나눴던 사랑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던 거죠.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이유는 고통의 올무에서 해방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누가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 언제 하느냐로 변질시켜 버렸죠.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치명적 실수를 안겨주는 원인이 됩니다. 같은 마음으로 모이고도 작은 것으로 서로 싸웁니다. 사랑으로 함께하고는 비본질의 문제로 원수가 되기도 하죠. 

 

17세기 대주교였던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in essentials, Unity), 

비본질에는 자유를(in non-essentials, liberty), 

모든 것에 사랑을(in all things. charity)"

 

본질에는 뜻이 달라지지 않게 일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이 아닌 것,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조금 다르더라도, 조금 어긋나더라도 서로 자유와 관용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사랑을 기반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조금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간다면 인정하고 이해하며 억압이나 강요가 아닌 자유와 관용이 필요하죠. 공동체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사불란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를 사랑합니다. 다 다르고 다 제각각이어서 더욱 사랑해요. 속도도 다르고 형태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달라도 우리는 그래도 같은 길을 간다고 믿습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조금 빠른 사람은 조금 기다려주고, 조금 늦은 사람은 조금 서두르는 배려가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나와 달라도 지금 내 곁에 함께 하는 이들은 나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안 차도 지금 내 주변에 오래 머물고 있는 이들은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이에요. 비본질로 귀한 나의 사람을 잃지 않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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