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9. 13:47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9:10~17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오는 본문에서 우리는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적 사건을 마주합니다. 워낙 유명하고 잘 알려진 본문인지라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죠. 이미 여러분은 이 본문으로 여러 차례 말씀을 듣고 나누고 묵상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본문을 우리가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지난주에 이어 우리 믿음의 중요한 뿌리를 구성하는 핵심을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성경에서 중요한 신학적 위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만찬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구원자로 오셨죠. 그것은 ‘우리의 죄’라는 보이지 않는 영적 올무를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우리에게 자유와 회복을 주시는 것이 창조의 완성이었기 때문이죠. 이는 곧, 우리를 온전하고 아름다운 생명으로 부활케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낮은 십자가를 통해 사탄의 계략과 권세를 부수셨고, 그가 주는 두려움과 유혹, 욕심과 이기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영적 메시아가 아닌 세상의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이죠. 어떤 이는 식민지 지배를 타파할 해방자를 기다렸고, 또 어떤 이는 빈부의 차이, 계급사회 타파 등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할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혁신을 꿈꿨던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요구와는 다른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정치 사회적 문제와는 거리가 있으셨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칙은 다수의 법칙이 아니라 소수의 법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정치 사회적 변화는 어떤 큰 능력의 지도자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작은 나 한사람이 변하여 사회가, 정치가 변하는 겁니다. 톨스토이가 그랬나요?
“모두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생각하지만, 정작 스스로 변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내란이니 대통령의 문제니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기 때문이죠. 대통령은 그저 우리의 표상입니다. 누구를 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국민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그 나라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일확천금의 욕심에 지도자를 뽑고, 그저 자기 편이라고 투표하는 행태가 낳은 비극을 우리가 맛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가능했던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아무리 권력을 준 사람들이라도 예수님을 쉽게 죽일 수는 없었겠죠. 예수님께 특별한 죄목을 붙이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처형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군중들, 곧 우리들 때문이었죠. 당시 군중들에게 예수님은 호응받지 못하셨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면, 호응에 답하시지 않은 것이죠. 예수님이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군중들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문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군중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그분이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초기 열광하던 군중들은 서서히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처형을 가능케 했던 동력이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웅주의 신드롬이 있습니다. 영웅을 만들어 놓고, 그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동화에나 나옴 직한 슈퍼맨, 배트맨, 히어로들을 통해서, 혹은 스포츠 스타, 연예인, 그리고 정치인들을 통해서 자신을 투영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그런데 열정적으로 환호하다가도 어느 순간 순식간에 돌아서는 것이 인기죠. 이유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내가 무엇을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치 않아요. 우리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못해 주면 오히려 죽일 놈이 되는 것이죠. 그런 욕심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죽어라 좋아하다가도 원수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 그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 연예인, 심지어 목사에게까지 그럽니다. 자신의 요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이죠.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이에게 열광하다가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세 안티가 되고, 욕하고, 원수가 됩니다. 참 우습죠? 예수님의 빌라도 법정에서 소리치던 사람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께 열광하던 사람이었고, 바라던 것이 많았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그만 죽이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할 심각한 사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을 대신해 줄 슈퍼맨이나 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주님은 나 대신 무언가를 이루어 주실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죠. 우리가 전능하신 주님이라고 외치면서, 그 내면에는 그분을 나 대신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능력을 뽑아 먹으며 나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스타가 아니십니다. 아이돌은 더더욱 아니시고요. 그분은 우리의 선생이십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하시죠.
요13:14,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선생은 모델이지 영웅이 아닙니다. 선생은 따라가는 것이지, 선생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은 길이 되어 주시는 것이지 그 길을 대신 걸어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길은 오직 내가 걸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가르치시지만 시험은 우리가 치러야 하듯이 선생에게는 제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제자를 통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제자 된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확히 인지해야 하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출발이 우리에게 있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오천 명이라는 대군중의 저녁 식사 자리보다, 따끈따끈한 보리떡과 팔딱거리는 물고기의 향연보다 더 귀한 기적은, 예수님과 내가 가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연합이었고, 그 나눔과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봐야 하죠.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은 너무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아마도 이미 내용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놓치는 부분이 있는 거죠. 혹시 여러분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지난주 우리는 제자들이 선교 훈련을 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다루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죠. 그리고 그들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죠. 정말 귀신을 다루고 병을 고치는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죠. 왜 기록이 없을까요? 아무일도 안 일어났기 때문일까요? 그러기에는 오늘 본문은 다른 생각을 제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자신이 한 일을 예수께 모두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가 하긴 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만 궁금한가요? 일단 그 궁금증을 버리지 말고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고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라는 곳으로 가시죠. 이곳은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있는 곳으로 예수님의 사역 동선과는 비교적 먼 곳입니다. 멀다기보다 낯선 곳이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곳으로 가신 이유는 수고한 제자들을 위로하고 쉬시기 위함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군중들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죠.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무슨 일인지 본문을 그대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서 9:12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구절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저는 이 구절이 무척이나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군중들의 잠자리와 먹을 것을 먼저 구하고 있기 때문이죠. 제자들의 눈에 이웃의 필요와 도움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역지로 보내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이미 제가 병 고침과 귀신 다룸이 어떤 능력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제자들에게 이웃의 아픔이 보였던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자랑거리는 그 능력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능력을 입어 이웃에게 다가갈 때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 때문에 들떠 있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이웃을 만나다보니 자신의 능력보다 이웃의 아픔이 더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중심은 능력이 아닌 이웃의 아픔과 필요로 변해갔던 거죠. 그러니까 사역을 보내신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며 나누는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작은 마음의 변화가 오늘 기적의 시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제자들이 이웃의 아픔을 알고 주님께 고할 때 주님의 대답은 이러셨습니다.
누가복음서 9:13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러나’라는 말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간청에 당신이 직접 그 일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죠. 제자들은 예수님께 먹을 것을 부탁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제자들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고 말입니까?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신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생각하고,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나의 것을 나누기 원하는 마음은 하늘의 축복을 부르는 강력한 우리의 도구임을 아셨기 때문이죠. 그리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찾아 나서죠.
이때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주님께 나선 것입니다. 이 부분이 놀랍습니다. 본문은 이 작은 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기에 충분치 않다고 하는 제자들의 말을 언급하죠. 그런데 저는 그 부분이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자들이 부정적으로 상황을 읽었다면 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누군가 그것을 제자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이 한 아이로부터 왔다고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죠. 아마 부정적인 제자였다면 그 아이 혼자 먹어도 모자랄 그 빵과 물고기를 받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시작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쓰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와 감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나의 작은 시간, 나의 작은 마음, 나의 작은 생각을 드려 주님과 나눔으로 아름다운 기적이 만들어집니다. 비록 작은 나의 것이지만, 볼품없고 보잘것없는, 때론 가치 없어 보이는 나지만, 그렇게 주님께 드리며 고백하고 나눌 때 주님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지난주, 저는 기도가 주님과의 나눔이라고 말씀드렸죠. 회개가 내 죄를 주님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나누고 연합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기적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요. 내가 나눠야 일어납니다. 내가 마음을 열어야 일어나고요. 탕자처럼 내가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드린 작은 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보세요.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아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높이 들고 하나님 아버지께 축복을 비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의 식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죠. 작은 것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안 될 것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기적은 따로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은 오천 명이 먹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남의 배고픔을 위해 제자들이 나서서 주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자기만 알던 제자들이 남의 아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기적이에요. 자기 혼자 먹기도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눴다는 것이 더 큰 기적이에요. ‘이 작은 것을 나눠봤자 누구 코에 붙일까?’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일 거예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기도한다고, 묵상한다고, 예배한다고, 나의 것을 나눈다고 뭐가 달라질까?’하는 생각은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을 드리고 사랑을 나눕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그 기적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많은 이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큰 나무도 실은 작은 밀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죠. 그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렇게 내 작은 것을 드리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렇게 내 작은 씨앗을 뿌리면 어느샌가 내 앞에 풍성한 열매로 가득한 커다란 나무가 서 있어요. 그렇게 기적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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