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6. 04:45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 9:7~9 분봉왕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서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롯은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내게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누리고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네요. 보통 휴일 다음에는 출근하기 힘들죠. 쉼이 계속되었으면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쉼이란 우리의 삶에 활력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좋아하지만 영원히 자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죠. 잠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는 선물이지 잠이 삶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은 성탄의 기쁨으로 더욱 활기차고 기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헤롯이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사역이 무르익으면서 갈릴리 지역에 큰 영향력을 주자 그 내용을 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일단 여기 등장하는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그는 헤롯대왕의 아들로 헤롯대왕 사후, 헤롯 아켈라오, 헤롯 빌립과 함께 유대지역을 나눠서 통치하는 자였습니다. 그중에 헤롯 안티파스가 기독교인에게 유명했던 것은 그가 세례 요한을 참수에 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정치적으로 교활했습니다. 그가 분봉왕이던 시절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갈릴리 서쪽 해안에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황제에게 받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디베랴(티베리아스)라고 불렀죠. 이후 갈릴리 바다까지 디베랴바다로 부르게 하였다고 하죠.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여우'라고 하셨겠습니까? 또한 그의 사생활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다 이복동생의 아내를 갈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가 바로 헤로디아죠.
성경은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요한을 죽이게 된 계기를 헤로디아 때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 그것뿐이었겠습니까? 헤롯은 세례요한이 눈엣가시였을 거예요. 세례요한은 연일 헤롯의 실정을 비판하고 정치지도자의 도덕적 해이를 지적했기 때문이죠. 그의 비판에 사람들이 호응하며 주목을 받자 그는 세례요한을 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헤로디아의 요구가 있자 못 이기는 척 죽였던 거죠. 마치 자신이 아니라 헤로디아의 요구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사실 이는 자신의 정적 제거의 일환이었음을 모두가 압니다.
그런데 그런 세례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요한의 환생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이죠. 그때 가장 겁을 먹은 인물이 바로 헤롯 안티파스였을 거예요. 자신이 한 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세례요한을 자신이 죽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다른 정적이 나타났다는 의미 때문이죠.
주로 사람들은 자신이 흔들리는 이유는 타인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고, 누군가 나를 무시하며. 누군가 나로 하여금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일이 잘 되지 않거나 힘을 쓰지 못할 때 주로 남의 방해, 다른 사람의 능력을 제거하려고 애를 씁니다. 마치 정적을 죽여 자신을 더욱 견고하게 하려는 헤롯처럼 말이죠. 이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나를 몰라는 주는 이유가 나보다 잘하는 사람 때문이고, 나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내 옆에서 더 잘하는 사람 때문이라고 믿는 전형적인 남 탓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명에 도가 튼 돼먹지 못한 인격의 극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 경쟁이 늘 남입니다. 타인이죠. 내 옆에 있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남을 이겨서 내가 높아지는 것을 경쟁이라고 하죠. 그러나 경쟁은 남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경쟁자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을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야 해요.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킨다는 것은 나를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나의 오늘을 넘어 내일로 나가는 거죠. 오늘의 자리를 뚫고 더 나은 내일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나를 경쟁 삼아 전진함을 의미하죠.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남을 제물삼지 마세요. 나의 경쟁자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남을 죽여서 내가 우뚝 서는 일은 폭력적 깡패나 독재적 망상에 빠진 미련한 사람들이 하는 생각입니다. 오로지 어제의 나를 넘어 오늘을 만들고, 오늘의 나를 뛰어넘어 내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온전한 성장을 합니다. 경쟁은 오직 나를 이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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