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묵상24 - 우리가 부여받은 삶은 주님의 사명을 동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사사기 8:10-17

2019. 8. 12. 06:52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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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기드온은 미디안 군대를 마지막까지 쫓아 종지부를 찍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본 싸움에서 90%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그래도 남은 군사들이 15,000명에 이르죠.
본래 전쟁에서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가 훨씬 힘든 법입니다.
미디안 군대는 아마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탈진 상태였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300명의 소수 정예로, 남은 15,000명을 전멸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적군의 장수는 사로잡았습니다.
압도적인 전술이 아니고는 적장을 생포하기 또한 쉽지 않죠.
아무튼 기드온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이 찾아오죠.
미리 읽었지만 기드온은 추격의 과정에서 두 차례 모욕을 당합니다.
숙곳이라는 곳에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죠.
브누엘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이 두 곳은 이방 땅도 아닙니다.
같은 민족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기드온을 돕지 않습니다.
마치 같은 민족이 힘을 합하여 싸워야 할 때, 발을 빼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우리에게서 먼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리 큰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나를 돕지 않을 때는 마음이 별로 크게 상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나와 가깝고, 나와 함께 해야 할 사람이 함께하지 않으면 상처가 됩니다.
게다가 할만한 사람이 그러면 더욱 상처는 깊어지죠.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
같은 울타리에 있다는 것은,
같이 일하고, 같이 걸어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할 사람들이란 뜻이죠.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고, 같은 공동체로 있으면서 함께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상처가 되죠.
아마도 기드온은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의 말씀에 기드온의 상한 심령이 그대로 드러나죠.
7    그러자 기드온이 대답하였다. "좋소! 주님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나의 손에 넘겨주신 뒤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당신들의 살을 찌르고야 말겠소."
9    그래서 그는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내가 안전하게 성한 몸으로 돌아오는 날, 이 망대를 헐어 버리고 말겠소" 하고 말하였다.
읽어보면, 이를 가는 듯한 음성지원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죠.

물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이해도 됩니다.
지난 묵상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기드온의 기적 같은 대승을 알지 못했다면 쉽게 동참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죠.
오랫동안 노예근성에 젖으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섭고 두렵기 때문이죠.
내가 익숙한 자리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자리, 새로운 마음이라는 것이 말이 쉽지 미지의 세계거든요.
그 미지의 세계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믿음 없이는 우리는 새로운 길을 걷지 못하죠.

문제는 기드온이 그들에게 보란 듯 복수하는 장면이 오늘 나온다는 겁니다.
과연 이런 기드온의 태도가 옳은 것일까요?
제가 기드온을 자꾸 폄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용서하세요.
기드온이 믿음도 없고, 소심하고, 겁쟁이라고 몰아가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런 마음이 들어요.
왜냐하면 기드온이 마치 저처럼 보이거든요.
믿음도 없이 어쩔 수 없어서 끌려가는 듯 사명을 감당하는 못난 자아처럼 말이죠.
하나님의 기적과 약속을 보장받고도 여전히 의심이 떠나지 않는 모습이 제 안에 있거든요.

어떤 이들은 당연히 응징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자리, 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도 같이 짊어질 줄 알아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면 공동체로서의 역할이 이미 깨졌다는 거죠.
그런 모습을 방치하면 공동체는 와해될 것이라며 기드온을 옹호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그런 설명에 일면 동의합니다.
함께하는 가족이 서로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힘을 못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한 마음이 된다면 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보듬고, 사랑할 때 그 공동체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커도 분열하고, 각기 다른 생각과 뜻을 품으면 그것은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분열은 싸움에서 오지 않아요.
분열은 함께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분열은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는데서만 오지 않아요.
분열은 나에게만 관심할 때 옵니다.

아무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응징이 좋은 응징인지, 아니면 나쁜 응징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응징은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또한 사랑으로 덮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여러분 각자에게 돌립니다.
다만 한 가지 주시는 마음은 있어요.
오해를 받을 수는 있겠다는 마음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거죠.
기드온이 왜 그리 열심히 추격을 했을까요?
기드온이 끝까지 적장을 생포하려고 노력했을까요?
기드온이 왜 숙곳 젊은이를 잡아서 속곳의 지도자 이름을 깨물었을까요?
혹시 복수심에서,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곧잘 복수심으로 일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 두고 보자, 꼭 보여주고 말 거야!” 이런 심정으로 말이죠.
물론 그런 에너지가 사역의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시작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적군 대비 1/5 정도 수준인 32,000명도 많다고 하시고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300명은 답이 안 나오는 숫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왜요? ‘이 전쟁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런데 기드온이 지금 어떤 동력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나의 복수심, 나의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모릅니다.
기드온이 어떤 마음으로 끝까지 전쟁에 임했는지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모르죠.
그러나 오해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명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나의 자존심으로 하는 전쟁으로 비추일지도 모른다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동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서 발휘되는 에너지가 있죠.
그것을 보통 능력이라고 합니다.
내 능력으로 동력을 삼을 수도 있고요.
때론 가족이나 내가 책임져야 할 타인들을 향한 마음이 동력이 되기도 하죠.
재물이나 성공하고픈 욕망도 그 동력 중에 하나이고요.
자신의 자존심 또한 그중에 포함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동력들이에요.
무엇이 낫다 나쁘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동력을 갖는다는 것이 다르죠.
바로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동력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죠.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 사명을 동력 삼아 전쟁에 세워진 사람이죠.
그에게 사명이 아니면 용기도, 힘도, 전술이나 전략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사명이 아니면 전쟁에 나설 이유도 없죠.
그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이 전부 다 였습니다.
그 사명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한 것도,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도 목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루시는 계획일 뿐이죠.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동력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이들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하죠.
롬 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삶은 주님의 사명을 동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주를 위한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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