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303 - ‘나’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세요.

2025. 5. 25. 12:00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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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17:11~14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내용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 치유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자신들이 낫기를 원했고, 주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병이 나았습니다. 전형적인 치유 사건이죠.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제 설교를 듣지 않아도 어떤 설교가 될지 예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이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병환자가 고침받는 이적의 사건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나병이 아니라 영혼이 치유되는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받는 사건은 오늘 본문으로 끝나지 않죠. 더 연결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치유 사건은 더욱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도 몰라요. 


제가 계속 말씀드리는데요. 매일 묵상을 하면서 제가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잘 아는 말씀일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메시지가 많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이 제게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번 주간 매일 아침에 우리가 같이 나누기로 하고요. 오늘은 나병환자가 치유되는 사건, 그 속에 담긴 이야기, 내 영혼을 치유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특별한 메시지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 공동체 모든 가족이 성경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견해, 어디선가 들었던 설교, 그리고 누군가의 해석이 아닌,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성경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눈과 마음으로 말씀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고정되고 고착된 말씀으로 성경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면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지 않고 말씀해 보세요.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시죠. 그렇다면 이 만남은 누가 찾아가서 만난 것일까요? 예수님이 찾아 가셨을까요? 나병환자들이 찾아왔을까요?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여러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오늘 말씀을 다시 보죠. 제가 읽겠습니다.


누가복음서 17:11~1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우리는 간혹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죠. 아마도 제 질문에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왔다고 기록된 장면이 많기 때문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나병환자는 철저하게 사회적 격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동네에 들어올 수가 있었을까요? 동네 근처에만 와도 아마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것은 율법으로 금지된 사항이에요.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을 하시죠. 그것은 나병에서 나았다는 것을 제사장에게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그들의 회복여부를 쥐고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그들이 쉬이 예수께 다가올 수 없는 것이죠. 간혹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께 나왔다는 설교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그것은 그저 우리의 상상일 뿐입니다. 당시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이야기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만나셨다면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어렴풋이 읽으면 그게 별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들이 즐비하죠. 저는 성경이 어쩌면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렇다면 어디서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셨을까요? 여기에는 조금의 지리적, 그리고 문화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다고 하죠. 지도로 보면 이쯤 됩니다. 그곳에 현재 이스라엘의 부르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 있습니다. 현재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죠. 사진을 보겠습니다. 최근의 사진이죠. 여기 보면 교회 안쪽에 작은 장소가 나오는데요. 이곳이 나병환자들이 격리되었던 곳입니다. 사실 그곳은 지하 웅덩이였습니다. 그 위쪽에는 이런 구멍이 뚫려 있죠. 왜냐하면 그곳이 옛날에는 물 저장고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감옥으로도 쓰였죠. 그리고 사회적 격리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아까 보신 교회는 지하를 파서 그 웅덩이를 뚫어 옆에 지은 교회죠. 선뜻 이해가 안 가실 것 같아 비슷한 다른 저장고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은 아까 보신 것과 비슷한 시설의 사진이에요. 이런 곳에 열 명의 나병환자가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죠.


아마도 예수님은 그곳에 찾아 가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은 말이 좋아 사회적 격리지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죠. 그곳에 예수께서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상상이 떠오릅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찾아오시는 것처럼, 그곳에 있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나병환자들의 도움 요청에 예수님의 첫 말씀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서 17: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자! 여기서부터가 재미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지금 나병환자들은 병이 나았을까요? 안 나았을까요? 다시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들은 지금 격리 수용 중입니다.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처지죠. 왜냐하면 그들은 병자들이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곳을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지금 나았기 때문에 그곳을 나선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안 나았는데도, 나선 것일까요? 여러분은 알고 계시죠? 성경은 그들이 가는 도중에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몸이 아직도 나병으로 가득한데 그 집을 나선 거죠. 왜죠? 그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미 이루어진 줄 믿고 나선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너희는 아무 변화가 없어도 낫는 줄 알고 움직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순종 테스트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 나아가 하나님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깊은 선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믿음의 원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아직 고쳐지지 않았지만, 고쳐질 것을 믿고 그 자신의 감옥에서 일어나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매일 묵상 제목을 기억하시나요?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이 제목은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죠.


마가복음서 11:24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이미 받은 줄로 믿고 먼저 일어서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쓰신 책에서 그런 예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일찍이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서 차일피일 미뤘답니다. 그렇게 탕자처럼 삶을 허비하다가 갑자기 시력을 잃었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에 그때야 자신이 주님 앞에 서원했던 기억이 떠올랐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했답니다. 


‘주님, 내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나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주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더래요. 이 목사님은 너무도 기뻐서 감사의 찬양을 하다가 잠이 들었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침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절망 가운데 주님께 부르짖었답니다.


‘주님, 왜 아직 내 눈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너는 눈을 뜨게 해 주면 인생을 바치겠다고 하였으나 나는 네가 인생을 바치면 기적을 행할 것이니 지금 일어나 너의 일을 하여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삶의 고정된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는 패턴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가 노력이라는 원인을 가져야 성취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를 얻으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야 인정받는다”는 거죠. 이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력하면서도 잘 될지, 안 될지 몰라서 늘 불안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덕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미 주님은 우리에게 결과를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원인으로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 말에 여러분은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우리의 삶의 패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반대입니다. 결과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이제 그 결과를 기대하며 기쁘게 나의 할 일을 찾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보지 않고 믿는 것 위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아직 나음을 체험하지 못한 채로 발을 옮긴 것은 현실을 넘는 인식의 전환, 믿음이라는 세계 안에서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선언하시지 않았습니다. 치유된 ‘존재로서 행동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내가 낫는다면 움직이겠다”는 조건적 순종을 버리고, “나는 이미 나은 사람처럼 살아간다”는 정체성의 전환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동입니다. ‘내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자처럼 행동함으로써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현실은 우리의 인식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인식론적 전환이라고 하죠. 우리가 보는 현실은 그 자체가 객관적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틀’(카테고리) 안에서 해석된 결과라는 것이죠.


현대 심리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 있습니다. 인지행동치료(CBT)라는 심리치료 기법이 있습니다. 그 학술의 핵심 원리는, ‘감정은 사건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현실이 바뀌어서 행동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그 행동이 현실을 바꾸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리십니다. “현실이 변해야 움직이겠다”는 우리의 인식 틀을 깨뜨리고, “믿음으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행동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이미 우리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 16:33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선포했죠.


빌립보서 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이긴 전쟁의 병사입니다. 승리를 믿고 싸우는 자들입니다.


중국 고전 [손자병법]에는 [선승구전 先勝求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고 싸움을 걸고, 지는 군대는 먼저 싸움을 걸고 이기려고 한다.”


이 말은 계획과 확신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미 이긴 확신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전쟁조차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준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원리 위에 살아갑니다. 이긴 줄 알고 싸우는 것, 이미 주셨음을 알고 움직이는 것, 그것이 신앙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에게 치유를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라, 그러면 나으리라’ 하십니다.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너의 현실을 넘는 행동”,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낫게 해 주시면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죠. 우리는 이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감옥이에요. 내가 아는 논리, 내가 세운 기준, 내가 쌓은 경험의 벽,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감옥입니다. 그 안에 갇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 원리가 이해되지 않고,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틀을 깨고 나오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시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합니다. 결과를 안 상태로 움직이는 삶, 그것은 불안이 아닌 기쁨과 자유, 노동이 아닌 찬양과 헌신으로 채워집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보이지 않아도, 낫는 줄 알고 움직여라.”
“지금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너를 지키시는 줄 믿고 기뻐하라.”
“지금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너의 길을 예비하신 줄 믿고 겁내지 말고, 나아가라”


그 말씀이 여러분의 틀을 깨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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