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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미가서묵상

미가서묵상일기 01 - 깨어지는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미가서1:1   이것은 주님께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를,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보여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때는 유다의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대를 이어 가면서 유다를 다스리던 기간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공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추위가 다시 몰려오는 기분이네요. 늘 그렇지만 그래도 세월엔 장사 없고, 정해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걷죠. 가끔 우리 눈에 막다른 길로 걷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죽음에서 생명이고, 광야에서 가나안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는 오늘도 우리는 좋은 시간, 좋은 날을 바라보며 시작하길 빕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미가서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미가서는 구약성경의 후반부에 자리한 책입니다. 보통 구약성경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죠. 역사서와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입니다. 역사서에는 모세오경을 포함하여 연대기적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기록된 책으로 주로 구약성경의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죠. 시가서는 우리가 잘 아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묶어서 통칭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책들이 선지서인데, 주로 선지자의 이름으로 제목이 구성되어 있죠. 이것도 대선지서, 소선지서 두 가지로 나누는데요. 주로 책의 분량에 따른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 미가서는 소선지서에 속하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서의 기록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죠. 때는 유다의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북과 남으로 나뉘었던 분열왕국시대였죠. 악한 군주들로 인해 하나님과 거리감이 있었던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을 하였고, 그나마 비교적 북이스라엘보다는 나았던 남유다도 우상숭배에 빠지는 등의 빛을 잃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본문은 왜 이 미가서가 쓰였는지도 밝히고 있는데요. 그것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를 보여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고, 예루살렘은 남유다의 수도였으니, 이는 두 나라의 문제와 해답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미가서를 통해 주님이 보시는 문제점들과 또한 이를 해결하고 회복하는 길에 대해 묻는 묵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간혹 우리는 어떤 것이 문제인지도 모를 때가 많죠. 또 문제점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도 있죠. 물론 미가서는 멸망 전의 남유다에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는 어쩌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 영혼에 동화줄 같은 말씀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순간은 마치 벼랑 끝 낭떠러지 같은 위험한 상황입니다. 멸망하기 직전의 모습은 끔찍하죠. 모든 것이 깨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그래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바로 그때입니다.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순간이죠. 그래서 그 절망의 순간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미가서는 그 절망의 순간에 적은 글이죠. 여기서 저는 또 다른 희망을 봅니다. 깨어진 자리에서만 새로운 것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죠. 무너진 곳에서 또 다른 것들을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선교사로 모처에서 사역할 때였어요. 그곳에서는 연일 산불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뉴스에서도 대서특필할 만큼 온 나라의 산 곳곳이 산불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현지의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듣고는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산불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산에 불을 놓는다는 거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산이 시커멓게 탄 자리에서 고사리와 같은 새싹이 돋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무의 껍질을 뜯어 식량을 삼을 정도로 열악했던 그곳이기에 일면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 저는 처음으로 불탄 자리에서 돋는 새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깨어지는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무너지는 것이 축복일 때가 있어요. 그 깨어지고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꿈이 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절망의 순간이 오히려 희망을 싹 틔우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움켜잡은 것을 놓으면 그제야 그것이 작고 초라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가 있어요. 그리고 더 큰 꿈으로 우리를 인도하죠. 그래서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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