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 07:15ㆍ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하 3:17~21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상의하였다. "여러분은 이미 전부터 다윗을 여러분의 왕으로 모시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윗을 두고 '내가 나의 종 다윗을 시켜서,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지배와 모든 원수의 지배에서 구하여 내겠다' 하고 약속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은 베냐민 사람들과도 상의한 뒤에, 이스라엘과 베냐민 사람 전체가 한데 모은 뜻을 다윗에게 전하려고, 헤브론으로 떠났다. 아브넬이 부하 스무 명을 거느리고 헤브론에 이르러서, 다윗을 찾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를 따라온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끝나자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제 그만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을 높으신 임금님 앞에 모아 놓고서, 임금님과 언약을 세우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임금님이 원하시는 어느 곳에서나, 원하시는 대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떠나 보내니, 그가 평안히 떠나갔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다고 할까요?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다고해야 맞는 말일까요?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자 바로 배신을 해 버립니다. 참 재미있어요. 배신이라는 것이 팩트는 사라지고 자신의 유리함만이 남는 것이거든요. 이미 아브넬에게는 자신의 행동에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 왜 자신이 지적을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사실만이 강조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할 복수심이 불타 올랐을까요? 그는 이스보셋에게 복수할 가장 큰 카드를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역사도 자존심도 없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도, 사명도 없어요. 오직 자신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빼어든 카드가 배신입니다.
그렇게 아브넬은 다윗과 접촉했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는 이런 상황에서의 다윗에 대해 묵상을 했는데요. 오늘은 아브넬에 대한 묵상을 해 보겠습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찾아가죠. 소위 족장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지파개념으로 나뉜 공동체였기 때문이죠. 뭐라고 할까요? 중세 유럽에는 영주라는 정치 권력이 있었는데요. 봉건시대 농촌 공동체를 지배하는 귀족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지방자체제도처럼 각자의 세력을 가졌죠. 이들이 서로 협력하여 최대 영주를 왕으로 세우는 식의 통치제도가 형성되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그런 형태의 국가를 이룬 것이죠. 각 지파들을 통합하는 과제가 단일 국가의 최대 난제였는데요. 그것을 아브넬이 잘 알았던 거죠. 이미 사울의 시대를 통해 통합되었던 권력이 사울의 죽음으로 또 다른 구심점이 필요했는데요. 아마도 모두들 다윗이 그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뒤집은 것이 아브넬이었죠. 그는 이미 이스라엘 각 지파들을 설득해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위에 앉힌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각 지파의 필요한 부분을 적절히 긁어주며 협상을 했을테죠. 그런 의미로보면 아브넬은 최고의 전략가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아브넬이 베냐민지파를 따로 만나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베냐민지파는 사울왕의 출신 지파였죠. 아마도 사울왕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베냐민지파를 설득하는 일이 아브넬의 계획에 중요한 요소였겠죠. 물론 설득을 해 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뜻을 한데 모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자! 그런데 이 모든 과정 가운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이 있는데요. 그것은 그의 설득 과정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지파를 설득하는 첫 마디를 보세요.
"여러분은 이미 전부터 다윗을 여러분의 왕으로 모시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이것만 떼어 놓고 읽으면 무슨 독립운동 투사의 출정식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어요. 이미 그 기회를 날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다 아는 사실을 몇 년동안 미루게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수 년 전에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는 이스라엘 지파의 마음을 희석시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 아닙니까? 바로 아브넬 자신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는 마치 그런 사실이 없었던 듯, 아니 자신이 아닌듯 정의의 사도처럼 외치는 저 모습이 참 속보이죠.
그런데 이 모습에서 왜 또 나 자신이 아른거릴까요? 자신에게 유리하면 손바닥 뒤집듯 진리를 왜곡하는 그런 나의 간사함이 왜 자꾸 생각날까요? 시민이 잘 되어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옳습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레토릭은 훌륭해요. 그러나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시민을 이용하는 말은 틀렸습니다. 자신의 정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수사(修辭)에 불과할 뿐이죠.
혹시 오늘 아브넬의 말들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참 간사하구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지'
뭐 이런 생각 드시나요? 아무튼 아브넬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미래까지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아브넬의 말들이 곱게 들리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약, 좀 무서운 이야기인데요.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말을 이렇게 듣고 계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고 계시다면요? 그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다면 말이죠. 좀 등골이 싸늘해지죠?
말 너머에 내가 있습니다. 그 말이 나온 배경이 있고, 그 말이 원하는 목적지가 있어요. 우리는 그 너머의 자리를 잘 잡아야 합니다. 때론 이해해 주는 이 없어서 외롭고, 때론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 있어도, 그 말 너머의 내가 누구냐에 따라 축복이 좌우될 것입니다.
최근에 인종차별적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죠? 코로나로 인해 더욱 극심해진 모양새입니다. 젠틀(?)할 것으로 믿었던 서구 사회에서 더욱 심해지는 인종혐오를 보며 씁쓸한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이해와 포용의 사회를 외쳤던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혹시 속마음보다 겉사람에 치중했던 과오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요? 신분적, 인종적 차별을 품고 마치 선심쓰듯 남발했던 관용과 포용의 수사들이 한계점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어찌 서구 사회의 모순 뿐이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겠어요? 사랑, 은혜, 나눔을 외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고 떠들지만 결국 그 많은 나눔과 프로그램, 그리고 이벤트 너머에는 복음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고,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차별이 더욱 팽창되어 가지는 않았을까요? 그렇게 말 너머에, 그렇게 겉 모습 너머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말이죠.
오늘, 나의 말 너머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길 기도합니다. 나의 행동 너머의 그 자리에 주님도 계시길 원해요. 말이 어눌해도 괜찮습니다. 행동에 실수가 있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 말과 행동 너머의 자리는 깨끗해야 합니다. 그 출발이 주님이어야 합니다. 거기서 믿음이 시작되니까요. 그렇게 맑은 샘물이 솟는 하루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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