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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58 - 우리 인생에 버려질 것들은 없습니다. 다 귀해요.

골로새서 4:14   사랑하는 의사인 누가와 데마도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바울 자신과 늘 함께 있었던 아리스다고와 부침을 겪었던 마가를 함께 소개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오늘도 누가와 데마를 함께 소개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두 인물도 꽤 상반된 인물이죠.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인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었어요. 굳이 가르자면 바울의 제자라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아마도 바울에 의해 복음을 듣고 그를 따르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가 의사였기에 바울의 지병으로 인한 연이 닿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도 해 봅니다. 아무튼 그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에 동행한 이후, 그와 늘 함께 했습니다. 바울이 쓴 서신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누가를 콕 집어서 '그만이 자신과 마지막까지 함께 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바울의 순교에 이르는 때까지 누가는 함께했던 인물이죠.

 

반면, 데마는 누가와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다만 현재 바울과 함께하고 있음은 분명하죠.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라고 분명히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깊은 동지애를 가졌던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시 바울의 최후의 편지 디모데후서의 기록에 등장한 데마는 뜻밖의 행동을 하죠.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가 무슨 일 때문에 가족에게 돌아간 것인지, 혹은 바울과 싸우거나 기독교에 실망하여 배교를 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바울과 상한 관계로 떠난 것만은 사실인 듯 보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데마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좋지 않습니다. 열심을 다하다가 끝이 안 좋은 인물로 그를 설명하죠. 이런 평가는 데마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때, 틀리지 않는 평가 같아요. 그런데 저는 이번 골로새서 4장을 묵상하면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의 묵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개되는 인물들의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바울의 입장에서 묵상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며칠 전 묵상에서, 바울과 심한 다툼이 있었던 마가에 대해서도 그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보다 그를 바라보는 바울의 태도에 대해 묵상을 한 바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이에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과정인데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힘이 듭니다. 좋은 헤어짐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싶을 만큼 헤어짐은 아픕니다. 헤어짐의 대부분은 저의 부족함 때문임을 부인할 수가 없어서 더 아프고 아립니다. 때론 그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서 분노의 칼이 되기도 하죠. 남에게 책임을 넘기기 좋아하는 본연의 심성이 발동하기 딱 좋은 일이 헤어짐에 있어요. 어느 때는 그 아픔 때문에 새로운 만남에 대해 주저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글을 쓰는 바울은 몰랐을 거예요. 데마와의 헤어짐을 말이죠.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 줄 몰랐겠죠. 아마도 그 관계가 영원할 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오늘 본문의 기록은 아마도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 않을까 싶어요. 저 같으면 지웠으면 하는 기록일지도 모르겠어요. 조금만 지나면 내가 쓴 글이 민망하게 될 그런 기록이니까요. 그런데 그 기록은 수천 년이 지나서까지 없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읽힙니다. 어쩌면 바울은 잘못 쓴 글, 지우고 싶은 글, 틀린(?) 글인데요. 여전히 우리는 그 글을 읽고 있어요. 없어지지 않고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글을 바울의 실수로 읽어야 할까요? 며칠, 아니 몇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바울의 글로 읽어야 하나요? 아니면 제자 관리에 소홀한 바울을 봐야 할까요? 이와 같은 의미로, 그러면 데마에 대해 읽어야 할까요? 잘하다가 끝이 안 좋은 인물로 기억하라고 이 글이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런 해석은 쉬운 해석일지도 모르겠어요. '바울도 사람 관리에 실패하는구나?' '잘하다가 끝이 안 좋으면 곤란하지~' 정도의 해석은 너무 객관적이지 않을까요?

 

마치 실수와 같은, 오보에 가까운 데마에 대한 오늘 본문을 우리가 오늘 읽습니다. 수정되지도 않고 말이죠. 이것이 저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어요. 우리의 인생은 어느 것 하나 지울 수 없다고요. 우리의 시간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무서우신가요? 그래서 억울합니까? 아니요. 저는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수도 실패도 우리에게는 버려질 것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만남도 귀하고 헤어짐도 귀합니다. 성공도 귀하고 실패도 귀해요. 부유도 값지고 가난도 값져요. 어느 때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말이죠. 그래서 바울은,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이죠. 어떤 상황이거나 버릴 것이 없다고요. 그 속에서 감사를 할 줄 안다면 말이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실수나 실패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공이나 성취도 없어요.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있을 뿐이죠. 그것을 보고 경험하며 감사할 줄 아는 이들에게는 인생에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풍족도 귀하고 궁핍도 값지죠. 오늘 이 아침 하나님 앞에서 저는 한 가지 짐을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헤어짐의 아픔, 헤어짐의 두려움 말이죠. 가슴 한편에 묵혀있던 슬픔과 고통, 아픔을 떨구고자 합니다. 그 모든 순간이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귀한 나의 자산이라고 말이죠. 생각해 보니 그 경험들이 조금은 더 성숙한 관계성으로 나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편을 가르지 마세요. 이것은 좋은 것, 이것은 나쁜 것, 이렇게 구분하며 살지 마세요. 주님의 섭리 아래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버릴 것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독도 약이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원수도 친구로 만듭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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