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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골로새서묵상일기

골로새서묵상일기 56 - 뜻밖의 장소에서 위로하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골로새서 4:11   유스도라는 예수도 문안합니다. 할례 받은 사람들로서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나의 동역자들이요, 나에게 위로가 되어 준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유스도를 소개합니다. 본문은 유스도의 두 가지 이름을 말하고 있는데요. 당시 유대인에게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전통이 있는 반면에 당시에는 그리스어가 통용어였기에 그들의 이름도 히브리식과 그리스식 이름이 따로 있었던 것이죠.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이 골로새서를 집필한 바울입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죠.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이와 같이 유스도는 그리스식, 예수는 히브리식 이름인 거죠.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이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 혹은 '도우신다'는 것으로 유일신 사상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죠.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 대신 죄인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요구했죠. 그때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어느 예수를 풀어줄까?'라고 물었습니다. 바라바의 히브리식 이름도 예수였기 때문이죠. 이렇게 예수라는 이름을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데요. 가나안 정복의 선봉장이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어둠의 시기였던 패망 직전의 시기에 활동했던 호세아의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의 뿌리이기 때문이죠. 

 

신약성경에서 유스도라는 이름은 딱 세 번 나오는데요. 특이하게도 이 세 번 등장하는 이름의 인물들이 다 다릅니다. 그러고 보니 유스도라는 이름도 흔한 이름이네요. 그렇다면 오늘 바울이 소개하는 유스도라는 인물은 오늘 본문이 유일한 셈이죠. 그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이 어땠는지,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다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전하고 계신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유스도를 '할례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이미 언급한 사람들 중에도 할례 받은 사람에 속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아마도 아리스다고와 마가가 그들일 것 같아요. 할례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는 일단 유대인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그냥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고 할례 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데는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랬잖아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들을 잡아서 죽이는 데까지 열심이었던 사람 아닙니까? 마치 유대교의 전통을 반대하고 적대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거예요. 게다가 유대교의 오랜 전통인 할례에 대해서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또한 감정이 상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선민사상에 깊이 물들어 이방인을 마치 벌레 보듯 하던 이들을 향해 모든 생명은 똑같이 귀하다고 외치니 자신들의 사관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거예요. 그러니 반감이 강할 수밖에요. 또한 초대교회 당시 할례는 팽팽한 교리 싸움의 가장 기초가 되기도 했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전통이나 관습이 다르고, 감정이 상할만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즉 '할례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유대교의 배신자 취급을 받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 주었지요. 위로는 이런 데서 옵니다. 반대할 것 같은 사람이 동의해 줄 때,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죄가 용서될 때, 끝날 것 같은 상황에서 다시 기회가 주어질 때, 거기서 새로운 출발이 있어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물 한 방울 없을 것 같은 사막에 강을 내시고, 캄캄한 어둠의 절망에 빛을 밝히시죠. 절망의 순간에 만나가 쏟아지고, 막혔던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렇게 시간의 끝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뜻밖의 장소와 사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끝났다고 생각한 그 절망도 새로운 기회로 삼으시는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듯해요.

 

혹시 오늘도 어제와 같을 것이라고 믿고 계신가요? 저 사람의 성향은 이미 나와는 안 맞나요? 내 삶은 회복의 가능성이 없나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일단 축하드립니다. 이제 위로받을 기회가 생긴 셈이니까요. 그렇게 내가 단정하던 일이 깨어지는 때, 내가 포기한 것에 새로운 기회가 생길 때 우리는 위로를 받으니까요.

 

오늘 뜻밖의 사람에게서, 뜻밖의 상황에서, 뜻밖의 장소에서 위로하심의 역사가 일어나길 빕니다. 나의 단정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꿈이 이루어지는 하루이길 빕니다. 나의 불만이 감사가 되는 날이 되길 빕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어느덧 곁에 서 있는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나의 반대자들이 나를 위해 일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빕니다. 그렇게 작은 위로들로 가득한 오늘 주심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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