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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묵상 68 -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26:16-24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에 대한 반응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설교를 싫어하는 무리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당시와 너무나 흡사하죠? 예수님 당시에도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획책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매수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이르도록 했죠. 예레미야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일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편을 들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옛 선지자들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죠. 그의 말이 아프지만 들어야 한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일 ..
예레미야서묵상 67 - 오늘 처음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사세요. 예레미야 26:1~15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입니다. 7장에서도 성전 설교가 있었는데요. 성전 설교란 성전에 나오는 이들을 향해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들에게 하나님은 주님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외치고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죠?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사람일 텐데요. 그들에게 주님의 법대로 살라고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죠? 이유를 짐작하실 수 있으시죠? 그들의 성전은 그저 전통이었고, 그들의 예배는 그저 전시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외치면서 우상을 섬겼던 것이죠. 그분의 말보다는 자신의 바람이 더 중요했고, 그분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더 중요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당연히 주님과의 대화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성전주의..
예레미야서묵상 66 - 소망은 절망의 바닥에서 피어납니다. [2019.11.05.화] 예레미야 25:32~38 주님의 심판이 임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본문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큰 폭풍과 전쟁이 임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더 참혹한 것은 누구도 그들을 위해 울어주거나 묻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죠. 절망이 무서운 것은 우리의 심령을 메마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각이 좁아지고,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더 무서운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죠.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기에 일어날 힘조차도 없어지게 만듭니다. 절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내일이 없듯이 사람을 대하고, 시간을 대합니다. 나만을 위해 살고, 나의 만족만을 위해 살게 되죠. 그것이 인간의 잔혹성입니다. 나를 위해서 남의 인격을 짓밟는 것쯤은 일..
예레미야서묵상 65 - 오늘도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주님의 예비하신 손길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5:15~31 오늘 본문은 구약의 소선지자 요나를 떠올리게 하네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명하십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유대인인 요나에게는 이방 땅이자, 가장 위협적이고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땅이죠. 그러니까 적국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을 선포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 보고 죽으라는 말과도 같죠. 적국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려운데 그곳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다면 어떻겠어요? 친구간에도 잘못을 지적하면 화가 나고 안 보려고 하는데 말이죠.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은 비슷한 명령을 하십니다. 유대 땅뿐만 아니라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전하도록 하신 것이죠..
예레미야서묵상 64 - 끈질김은 올바로 사용될 때 인내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고집이 됩니다. 예레미야 25:1~14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읽은 예레미야서를 정리하는 성격의 글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이 말씀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4절 말씀과도 같습니다. 4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종 예언자들을 보내시되 꾸준히 보내셨으나, 여러분은 예언자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저의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요. 그것은 예레미야가 그 사역을 23년 동안이나 지속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23년 동안 어떤 일을 해왔다면 그것은 장인이라 불릴만한 년수입니다. 게다가 그 일이 늘 어려움에 부딪히고, 반대를 무릅쓴 일이라면 그야말로 대단한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하죠. 열 번 찍어..
예레미야서묵상63 - 그리스도인은 처연한 인생의 삶 가운데서 나를 인도하시는 작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24:1~10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개의 광주리를 보여주시는데요. 하나는 아주 좋은 무화과가 담긴 광주리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무화과가 담긴 광주리였죠. 이 두 개의 광주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이들의 미래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미래죠. 어찌 보면 단순한 이 환상에서 저는 2가지 단어가 눈에 밟혔습니다. 하나는 2절의 말씀입니다. 2 그런데 한 광주리에는 맏물 무화과처럼 아주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맏물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으시죠? 언젠가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 맏물이란 첫 열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순우리말이지 않을까 싶어요. 성경에는 맏물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첫 열매, 첫째 아들, 첫째..
예레미야서묵상62 - 양약고구(良藥苦口),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쓴 법입니다. 예레미야 23:30-40 한 번은 다림 교육에서 아이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학교 적응이 힘든 아이였는데요. 아이를 상담하면서 느낀 것은 부모에게도 상담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결론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 생명에게는 많은 손길들이 필요하죠. 또래 친구들도 필요하고, 가르치고 이끄는 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여기에 특별히 부모의 손길은 절대적입니다. 한 아이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렇다 보니 부모의 연약함이 아이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한계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자녀의 상담은 곧 부모의 상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부모와도 상담을 시작했고, 부모에게 권면할 내용들이 생겼죠. 아이의 낮은 자존감, 떨어지는 집..
예레미야서묵상61 -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이듯이, 형통의 길도 나로부터 입니다. 예레미야 23:16-29 오늘 본문은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먼저 예언자(선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죠. 오늘날 선지자들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선지자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목회자나 종교 지도자를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구약의 의미로 보면 맞습니다. 선지자들은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이니까요. 영적인 통로로서 주어진 사명이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로 말하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선지자와 왕, 제사장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완전히 성취되었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이제 그를 따라 영적인 선지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의 선지자라면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되는 거죠. 우리는 지금 역사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