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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묵상53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레미야 19:1-15 예수님의 말씀에는 많은 비유들이 등장합니다. 그 비유의 특징은, 당시 말씀을 듣는 이들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아시죠?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겨자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너무도 잘 알았어요. 열 처녀의 비유는 당시 결혼 풍습을 다루죠.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보고, 배우고, 체득한 관습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또 어떤가요?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자체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되죠.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을 유대인보다, 그것도 존경받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낫다는 식의 비유는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기 충분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시청각적 말씀선포는 사람들의 폐부..
예레미야서묵상52 -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18:19-23 오늘 본문은 좀 거북합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예레미야의 저주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예레미야의 모진 독설이 즐비합니다. 어찌 보면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을 만큼 충격적이죠.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일 하다가 오해받고, 오히려 공격을 받으면 황당하죠. 옛말에, ‘물에 빠진 놈을 건져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친다’는 말이 있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이를 갈게 되는 것은 어쩌면 연약한 우리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예레미야라고 별반 다르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저주는 왠지 불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니까요.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능력의 사람을 추구하는 존재니까요. 그래서 이 본..
예레미야서묵상51 - 땅을 바라보지 마세요. 예레미야 18:13-18 어릴 적에 친구들하고 야구를 하면서 놀았어요. 좀 고급스럽죠? 그렇다고 야구 장비들이 다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어요. 비료를 담는 두꺼운 비닐포대로 접어서 글러브를 만들고 야구공은 테니스공으로 대신했죠. 다행히도 배트는 좀 사는 집 친구가 있어서 진짜 야구 배트를 사용했답니다. 보호장비가 없이 포수를 하다 보니 공에 맞아 눈에 멍이 들기도 했고요. 심판은커녕 제대로 된 경기장 규격도 없어서 하다 보면 세이프이니 아웃이니 잡다한 것으로 싸우기 일쑤였죠. 그래도 야구 경기를 하기 전에는 제법 규칙도 정하고 경기장 정돈도 하고 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장의 선을 긋는 일이었어요. 보통 경기장 안과 밖을 구분하는 선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먼저 구분하는 일이었죠. 당시에는 그 선을 석회 가루로..
예레미야서묵상50 - 최고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최고입니다. 예레미야 18:1-12 오늘 본문은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 유명한 본문이죠. 이 본문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용하기도 했죠.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죠. 예레미야가 말씀대로 토기장이 집에 갔습니다. 거기서 토기장이가 하는 일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게 되는데요.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안 되면 다른 그릇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죠.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안에 있다." 중국 선교사로 일했던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의 책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이다]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예레미야서묵상49 - 우리가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내 마음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예레미야 17:19-27 오늘 말씀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이 핵심 내용입니다. 안식일의 개념은 간단합니다. 크게 2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요. 하나는 쉼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둘이 하나죠. 주님의 품에서 안식한다는 의미는 주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기억’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신앙이 되고,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되기 때문이죠. 안식일은 그 두 가지를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안식하며 주님의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또한 쉼을 통해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다시 결단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령, 부모님을 기억하는 방법들..
예레미야서묵상48 -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예레미야 17:12-18 예레미야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여느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구원에 대하여, 재앙으로부터 해방을 바라는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죠. 누군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죠? 그 뜻은 큰 그림에서는 별 차이가 나 보이지 않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곳에서 차이가 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흘러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작다고 우습게 여기던 것이 어느덧 좁힐 수 없는 큰 것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되죠. 기도할 때마다 다시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입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도, 간절한 열심도 아닙니다. 내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죠. 그러고 보면,..
예레미야서묵상47 - “너를 믿지 말고 나를 믿어라” 예레미야 17:5-11 어제 우리 교회는 중요한 결정을 하나 했습니다. 교회 이전과 관련된 일이죠. 우리 교회는 교회 소유에 관한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금을 모아두지도 않았어요. 교회 건축보다 사회공헌에 헌금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외적인 건강성을 드러내듯이, 영적인 공동체의 터전이 필요하다는 생각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다림 사역의 변화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것은, 이것이 혹시 우리들만의 편안함을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일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게다가 손에 쥔 자금도 없었고요. 교회 가족들의 면면을 보면 풍족하거나 넉넉한 이들이 하나도 없잖아요. 망설이는 제 마..
예레미야서묵상46 - 관리하세요. 예레미야 17:1-4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원칙을 죽인 것이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소설 [죄와 벌]은 살인자 주인공이 참회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렇게 단순한 설정이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내면의 심리적 묘사가 극대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가난에 찌든 대학생 주인공은 살인을 합니다. 액면으로 보면 살인의 죄는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범죄에 속합니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살인의 행위 이전 인간의 죄에 주목하죠. 살인자 주인공은 자신의 살인을 합리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인 전당포 노파는 악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자신은 그 돈을 인류에 봉사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존재로 합리화합니다. 작품은 우리 인간들 내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