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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묵상 77 - 희망은 좋은 기억 속에서 출발합니다. 예레미야 31:1-9 오늘 본문 31장도 30장에 이은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가 이어집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 선포는 어떤 말씀보다도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니까요. 이는 마치 창세기 1:1과도 같은 말씀처럼 들립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언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이죠. 3절에 이어지는 말씀도 위로가 됩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 이 말씀은 광야 시절, 이스라엘을 돌보셨던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킵니다...
예레미야서묵상 76 - 하나님이 콘트롤 하지 못하는 고통은 없습니다. 예레미야 30:12-24 수요영성예배에서는 요엘서를 묵상 중인데요. 이번 주 수요일에 나눈 것처럼 요엘서와 예레미야서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요. 참 신기하죠?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같은 말씀들이 겹쳐서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를 가도 그 말씀을 듣고 저기를 가도 그 말씀을 들을 때가 있죠. 가끔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에게서 같은 뜻의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말씀을 묵상하는데, 같은 종류의 말씀이 들리기도 하죠. 요즘 요엘서와 예레미야서가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두 책 모두 비슷한 시기의 내용들을 담고 있기에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요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포로로 삼은 이방 나라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하는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이 장면이 좀 이상한 것은, ..
예레미야서묵상 75 - 지금 당장 몰려올 멸망을 바라보며 살지말고, 주님 약속하신 회복을 바라보며 사세요. 예레미야 30:1-11 예레미야 30장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반환점을 돌았네요. 30장에서 33장까지는 소위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데요. 왜냐하면 바빌로니아에 의한 멸망과 포로 생활의 끝을 선포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40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40년이라는 기간은 상징적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부름 받아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살았고, 다윗 역시 40년을 왕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연수지만 예레미야는 모세나 다윗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나 다윗은 비록 출렁이는 세월을 살았지만 대체로 희망과 소망의 시간이었죠. 가나안을 향한 소망의 길이었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들에 비해 예레미야의 40년은 참 우..
예레미야서묵상 74 -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질문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29:20-32 구약성경에는 동명이인이 많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조금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된 세 명의 예언자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골라야의 아들 아합,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 그리고 느헬람 사람 스마야입니다. 아합하면 엘리야 시대 폭군이었던 아합이 떠오르시죠? 물론 오늘 등장하는 인물은 그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시드기야도 그렇습니다. 본문의 시대가 시드기야 왕 시대인데요. 그는 요시야의 아들이고 남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드기야는 마아세야의 아들이고요. 그는 당시 예언자로 활동했던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폭군 아합왕 시대에도 시드기야라는 이름을 가진 예언자가 있었어요. 그나아나의 아들이었던..
예레미야서묵상 73 - 기쁨과 슬픔, 아픔과 위로는 하나입니다. 예레미야 29:11-19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죠. 하나님의 계획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죠. 당연합니다. 누군가를 친구로 두려고 할 때도 우리는 이 믿음이 필요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자 할 때도 이 믿음이 있어야 하죠. 어디 저 사람이 나를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열고 도움을 받거나 곁에 친구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만남에는 이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굳이 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우리들 안에 의심과 의아가 ..
예레미야서묵상 72 - 피하지말고 즐기십시오. 예레미야 29:1-10 아침부터 비속어를 사용해 죄송합니다만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사람에게는 평생 써야 할 지랄의 총량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마다 그 지랄이 발현되는 시기가 다 달라서 서로 비교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죽기 전까진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어릴 적에 속을 썩이는 것을 너무 힘겨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부려야 할 지랄을 부리는 것이니까요. 차라리 일찍 그 모든 양을 털고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엄친아’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착한 아들이어도 결국 잠시 미루어질 뿐 지랄의 총량은 언젠가 발현될 테니까요. 이 말은 경북대 김두식 교수의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
예레미야서묵상 71 - 우리의 목적은 편안이 아니라 사명입니다.예레미야 28:1-17 오늘 본문은 예언자 하나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는데요. 그가 하나냐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와는 정반대의 말을 선포합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벗겨줄 것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선포한 것이죠. 얼마나 그럴듯했는지 예레미야도 깜박 속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책망이 아닌 격려요, 어려움이 아닌 편안함을 선포하는 것이니까요. 그와 비례해서 예레미야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예언자 하나냐의 말이 거짓임은 오늘 본문 후반절에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문제는 왜 하나냐가 그..
예레미야서묵상 70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만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27:12-22 며칠 전, 예레미야를 요나와 비교한 적이 있죠?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적국의 심장부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었어요. 만약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대립각을 세웠던 이스라엘에게 위협의 존재로 남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요나는 민족의 배신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는데요. 그 내용이 조금 거시기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게다가 그 멸망에 이웃 바빌로니아가 사용될 것을 말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