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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4 - 기적은 황무지에서 핍니다.

누가복음서 1:5~7   유대왕 헤롯 때에,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그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따스한 날씨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녹이며 시작하는 하루되시길 빕니다. 환경이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나로 오늘을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조사하여 순서대로 기록해 보기로 작정했었죠. 그 시작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왕 헤롯 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다 같은 헤롯은 아닙니다. 이 가문의 이야기는 많이 복잡한데요.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오늘 본문의 헤롯은 일명 헤롯대왕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죠. 정통 유대 가문이 아님에도 뛰어난 정치력으로 당시 로마 황실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유대의 분봉왕이 되죠. 분봉왕이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식민지를 통치하는 권력자를 뜻합니다. 총독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시려나요? 아무튼 그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리모델링했다는 점이죠. 바빌론 유수로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이후 스룹바벨이 재건하게 되는데요. 그때 축성한 규모가 형편없이 작았죠. 이를 헤롯이 거대한 성전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유대인의 환심을 사죠. 그래서 그때부터 이 예루살렘 성전을 헤롯성전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대왕은 복음서 초기에만 등장하죠.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2세 미만의 유아살해 명령도 이 헤롯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곧 죽고 그의 아들들이 유대를 나눠 다스립니다. 그중의 하나가 헤롯 안디바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세례 요한을 죽인 인물이 바로 이 안디바죠. 성경에서는 모두 헤롯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조금 헛갈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헤롯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 사가랴가 등장합니다. '아비야'는 제사장 직무를 맡은 조장의 이름이죠. 성전 제사장은 24개 조로 나눠져서 돌아가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중 8번째 조 이름이 '아비야 조'였던 거죠. 거기에 사가랴가 속해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엘리사벳이고요. 이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사촌지간이죠. 

 

오늘 본문은 이들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좋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우리가 그간 묵상한 바대로 말하면 그들의 마음에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런 신실한 사람에게 어려움이 생겼다는 거죠. 신실한 사람, 믿음의 사람에게도 걱정거리가 주어집니다. 그들에게 자녀가 없어서 고민이 깊었던 거죠. 당시 자녀가 없는 집안에 대해서는 오늘날과 다르게 저주받은 집안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당시의 문화였을 뿐, 자녀의 유무가 저주와는 상관없음을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려요. 

 

엘리사벳에게 자녀가 없고 나이가 많았다는 기록은 어떤 한 여인을 떠올리게 하죠.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그녀도 자녀가 없었고, 나이가 많아 아이를 낳기 어려운 지경이었죠. 그것 때문에 어떤 마음의 갈등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이스마엘이라는 존재를 통해 느낄 수 있죠. 또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도 떠오릅니다. 그들과 같은 고통이 이 엘리사벳에게도 있었을 것이 불 보듯 뻔하죠.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압니다. 사라나 한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이죠. 엘리사벳 또한 그들과 같은 길을 걷죠. 그들의 고통은 마치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 주어지듯, 소망으로 변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의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주죠. 

 

기적은 황무지에서 핍니다. 주님의 역사는 내가 손쓸 수 없는 아픔에서 더욱 빛나죠. 어쩔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주님의 창조의 권세가 펼쳐집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픔은 주님의 기적을 부르는 시작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일은 내 인생에 주님께서 개입하시기 원하시는 신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의 아픔 속에 소망이 있고, 실패 속에 시작이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 돌아섬이 있고, 절망 속에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원치 않던 고통은 어느덧 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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