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후서03 - 나를 방해하는 산이 높을수록 도우시는 은혜의 골짜기도 깊은 법입니다

[2019.01.19.토]데살로니가후서 1:6-12
6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아주시고,
7 괴로움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주십니다. 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 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8 불꽃에 싸여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9 그들은 주님 앞과 주님의 권능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서, 영원히 멸망하는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10 그 날에 주님께서 오시면, 자기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사람에게서 찬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증거를 믿었습니다.
11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12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BCJC 가난한 묵상] 나를 방해하는 산이 높을수록 도우시는 은혜의 골짜기도 깊은 법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미 데살로니가전서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데살로니가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자들에게 따르는 어려움이 있죠.
대내적으로는 익숙한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이에 따른 외부의 저항들을 감당해야 하죠.
데살로니가교회는 새로운 말씀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순종과 믿음이 동원되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길을 간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버려야 가능하기 때문이죠.
제가 처음 중국에 가서 중국말을 익을 때였습니다.
다른 선교지에 대한 준비를 하던 제가 갑자기 중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중국어에 대해 준비가 전혀 없던 저는 중국에 가서야 처음으로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중국어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차라리 중국어를 배우지 않고 온 것이 다행이다. 어렴풋이 중국어를 배우고 온 사람들은 잘못된 발음을 고치기가 더 어렵다.”
물론 제게 위로의 말을 전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말이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이방인에 비해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아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지를 못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신앙에 믿음이 확고할수록 변화는 더 어렵습니다.

제가 느끼는 좋은 신앙이란,
말씀 앞에서 겸손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이죠.
그래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제뿐 아니라 오늘도 말씀하시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도 살려고 하죠.
어제의 확신으로 오늘을 살려고 합니다.
어제의 확신은 어제의 것이고, 오늘은 또 다른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니까요.
그렇게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을 버릴 줄 알았습니다.
그 용기가 새롭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변화를 겪으면 변화하지 않은 외부의 저항을 받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교회는 외부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잃지 않는 교회를 향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에 비해 약간의 시차가 있습니다.
보통 학자들은 그 시차를 1년 남짓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 1년이 지난 시점에도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고난은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암울하죠?

요즘 계속해서 묵상 되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외부의 공격을 없애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은 외부의 공격을 우리가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 말은 외부의 공격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있지만, 지금 내가 그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말씀드린 적 있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런 일들이 없어지지 않아요.
우리 앞에 늘 어려움은 있습니다.
아픔도 있고, 무거운 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그것을 우리가 지고도 남을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지 않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하고도 남는 힘을 주시는 것이 그분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래야 할 것은
'고통이 없기를', '아픔이 없기를', '어려움이 없기를'이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 더 성숙하기를',
'아픔을 넘는 힘이 있기를',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영적인 능력이에요.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예언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은 반드시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그 괴로움을 견딘 우리는 반드시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위로는 산을 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 안식은 수고를 다한 자에게 주시는 안식이죠.
그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앞에는 늘 벽이 가로막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벽은 견고합니다.
그러나 그 벽이 높을수록, 견고할수록,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 또한 크고, 강할 것입니다.
벽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벽보다 더 크신 주님의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도 깊습니다.
나를 방해하는 산이 높을수록 도우시는 은혜의 골짜기도 깊은 법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