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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후서09 - 어둠과 싸우지 말고, 빛을 밝히세요. 데살로니가후서 3:6-12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인용하죠.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서 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거부감이 들만한 책이죠.
바로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 [국가와 혁명]에 이 구절이 인용되었기 때문이죠.
옛 소련은 아예 공산주의 헌법에서 이 구절을 아예 헌법에 명시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능력에 따른 생산과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공산주의의 원칙이 되어 버렸습니다.

먼저, 저는 이 구절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 구절이 신체 건강한 사람에게는 정당한 말 같지만,
사실 오늘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역차별의 구절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단이 성행했습니다.
그중 영지주의가 강세를 보였죠.
아시다시피 영지주의는 영과 육을 완전히 구별해 버렸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가치를 두는 반면, 우리가 사는 삶의 시간은 무가치로 여겼죠.
그러다 보니 육신의 삶은 어찌 되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몸을 쾌락에 맡기며 살면서 영적인 생각만 깨어있으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죠.

생각해보면 오늘날 선데이 크리스천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6일의 삶은 전혀 주님과 관계없이 살다가,
마치 주일만 지키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양 사는 삶이 그렇죠.
세상을 사는 방식은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따르면서,
생각으로만 주님을 말하고, 머리로만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습 말이죠.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는 임박한 종말론도 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삶을 접고, 종말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돌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초대교회의 가치였던 이웃사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죠.

이 말씀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노동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구조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이들을 향한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상과 이념을 가진 이들이 행하는 오류에 대한 질책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인용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의 중심은 노동이 아닙니다.
이 말의 중심은 잘못된 가치관에 대한 말씀이죠.

그래서 바울은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죠.
여기서 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는 페리에르가조마이라는 단어인데요.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참견하고 주문한다’는 뜻입니다.

지난 수요영성예배에서 나눈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엡5:11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바울은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을 밝히는 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둠을 밝히고, 폭로하는 방법을 이어서 말하죠.
엡5:13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둠을 밝히는 방법은 어둠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지적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빛의 열매를 거두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의 행실을 드러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빛으로 어둠을 이기는 방법이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을 안 한다고 불평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죠.
어둠이 극성맞다고 한탄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죠.
그렇게 빛의 열매로 어둠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어둠에게 소리친다고 어둠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불을 밝힐 때만 어둠은 사라져요.
어둠과 싸우지 말고, 빛을 밝히세요.
절망과 싸우지 말고, 소망을 켜세요.
아픔과 싸우지 말고, 기쁨을 품으세요.
그것이 어둠과 싸우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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