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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더서묵상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에스더 9:5-19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읽기가 너무 불편합니다.
전세가 역전된 유대인을 통해 죽은 이들이 수백명입니다.
하만의 가족들까지 몰살을 당했습니다.
어제까지 죽임을 당할 처지였던 유대인 대신 하만의 일당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끔찍한 참극의 현장에서 할말을 잃습니다.
심지어 이 본문에서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래서 에스더서를 무시하는 신학자들이 많았던 것이 이해가 갑니다.

본문을 읽는 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이런 일련의 사태들이 모두 복수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몰살의 현장은 그대로인 이 사태가
눈뜨고 보기에 너무도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일까?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게다가 여리고 고울 것만 같았던 에스더의 입에서
살육의 시간을 하루더 연장해 달라는 말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모든 환상이 깨지는 듯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지 사실 묵상하기 많이 힘듭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래도 ....
주님이 숨겨놓으신 한가닥 묵상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
여러차례 본문을 읽고 또 읽었는데요.
우리의 합리적 판단이나 논리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생각을 찾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거의 포기할 무렵, 그나마 저 눈에 한 구절의 본문이 띄었습니다.
그것은 "유다 사람들은 그들을 죽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재산은 빼앗지 않았다."라는 문장인데요.
이 구절은 10절, 15절, 16절에 연속으로 반복되어 적혀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 있길래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을까요?

잔인한 살육의 현장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잠시 접고,
하나님의 메시지에 주목해서 생각을 집중해 보았습니다.
죽이기는 했지만 재산은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
혹시 이 잔인한 살육이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복수가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손을 통해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복수, 감정적인 복수가 아니라
대적자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소위 복수의 칼날이 우리 심장에 새겨져 있죠.
작은 것이라도 우리의 감정이나 의식에는 복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저하게 복수를 금지시키십니다.
그 이유는 복수가 우리를 심판자의 위치에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심판자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우리가 빼앗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가장 큰 잘못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된듯 우리가 권리를 남용하는 것인데요.
그것이 바로 복수입니다.
우리 속에 끊이지 않는 갈등과 고민, 불만과 불평의 저변에는 복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복수를 내려놓으세요.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억울함은 주님이 풀어주십니다.
심판은 주님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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