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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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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묵상40 - 이단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진짜 두려운 것은 내가 주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10:1~6) 오늘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 표현하시죠. 양의 문이라는 것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을 뜻합니다. 이에 대한 말씀은 7절 이후에 다시 나오니 그때 하기로 하고요.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를 따르는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양들을 이끌 때와 다른 가축을 이끌 때가 조금 다르죠. 소를 모는 것을 보면 주로 뒤에서 모는 데 비해 양들은 목자가 앞에 섭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 목자를 따르죠. 좀 엄밀하게 말하면 목자를 따르는 대장 양들이 있고, 그 대장 양들을 다른 양들이 따르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시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위조지폐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죠. 우리나라에 그 분야 ..
요한복음서묵상39 - 우리에게 주신 자리는 사명의 자리입니다. 요한복음9:35-41 고침 받은 소경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추궁을 당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들으신 모양이에요.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시죠. 이 장면을 조심히 읽어보면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 같아요. 메시지 성경은 직접적으로 그렇게 번역했네요. 그를 찾아가 만나셨다고 말이죠. 이는 바리새인들이 그를 대하는 모습과 은근히 비교됩니다. 그들을 고침 받은 소경을 오라 가라 마음대로 다루지만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시죠. 그리고 물으시네요. "인자를 믿느냐?"고요. 그는 바로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믿습니다" 분명하고도 확고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그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쫓겼어요. 이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밉보였다는 말입니다. 바..
요한복음서묵상38 -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마세요. 요한복음9:24-34 오늘 본문의 9장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이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그 이적을 설명하는 장면은 7절까지이고, 이후부터는 눈 멀었다가 고침 받은 이와 바리새파 사람들로 통칭되는 이들의 대화가 주를 이룹니다. 어제 묵상에 이어 오늘도 그 대화는 이어지죠. 이 대화는 내일도 이어집니다. 이렇게 길게 성경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뜻이겠죠? 바리새인과 소경(지금은 고침 받은)의 대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화, 높은 자와 낮은 자의 대화, 여기서 우리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대화는 온전한 대화가 아닙니다. 마치 검사가 죄인을 대하듯 대화가 아니라 심문에 가깝습니다. 그 모습을 적..
요한복음서묵상37 - 우리는 더이상 소경이 되지 맙시다. 요한복음9:13-23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이적이 일어난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네요. 혹시 예수님이 그래서 말씀으로만 고치시지 않고 흙을 개는 노동(?)까지 하시면서 고치시지는 않으셨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들은 안식일을 꼬투리 삼았습니다. 양상이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와 흡사하죠. 그들의 눈에는 소경이 눈을 뜬 기적은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그 오랫동안 앞을 보지 않고 살던 이가 새 삶을 얻은 것은 기쁘지 않은 모양입니다. 정작 눈먼 자들은 이들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도 이런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우주를 운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그저 자연 이치로 치부하며 살죠. 나에게 주신 이 아침의 눈 뜸과, 해야 할 일들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삽니다...
요한복음서묵상36 - 아픔이 고역이긴 하지만 반면에 치유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9:1-12 오늘 본문은 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한 사건이지만 세 가지 정도의 주제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아요. 그중에, 예수님의 치유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흙에 침을 발라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서 씻음으로 나음을 입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로 하신 것인지 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간혹 학자들은 흙을 개어 바른 장면을 보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는 침의 약효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실로암에 가서 씻도록 한 장면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고 나은 나아만 장군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기적이, 예수님의 손길과 눈먼 자의 순종이 빗은 합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죠...
요한복음서묵상35 - 별은 스스로 빛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8:48~59 본문에서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논쟁 장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과 정죄가 깃들여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요. 유대인들은 타락하고 율법에 벗어난 이들을 통칭하여 사마리아인이라고 욕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귀신 들렸다는 의미는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이겠죠. 오늘날로 말하면 이단에 빠졌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과의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곡해와 왜곡을 일삼게 되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이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죠. 나의 생각이 가득..
요한복음서묵상34 -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하라” 요한복음8:39-47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용도 목사의 1930년 2월 20일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사람의 예수,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
요한복음서묵상33 -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8:31-38 오늘도 유명한 구절이 나오네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반발을 합니다. 자신들은 그 누구의 종이 된 적도 없다고 말하죠. 종이 된 적이 없으니 자유를 추구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말은 기본적인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들은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종으로 살았습니다. 물론 이런 물리적 종에 대한 메시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억압되거나 혹은 사로잡히지 않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뜻과 의지를 언제나 펼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누가 감옥에 갇힌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그러나 우리가 정말 자유로울까요? 사람들이 주는, 사회가 주는 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