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88)
요한복음서묵상48 - 거룩한 낭비(요한복음12:1:-8) 오늘은 향유를 주님께 가져와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벌써 그 향기가 방에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는 기름이 중요한 재산 가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의 향유는 그녀가 정성스레 모아둔 저축과도 같은 것이겠죠. 그런데 그것을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기름이 쏟아진다는 것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는 의미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리아의 행동은 낭비가 맞습니다. 셈에 밝았던 가룟 유다가 이를 정확히 꼬집죠. 그 기름의 양을 보고 삼백 데나리온쯤 된다고 추측을 하죠. 아마 맞을 겁니다. 본래 그 분야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촉이 발달하게 되기 마련이거든요. 요한복음 기자는 가룟 유다가 어디에 관심이 많았는지를 가로 글을 통해 콕 집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행동이 도..
요한복음서묵상47 - 어떤 악함도, 공격도, 원수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나에게 유익의 도구가 됩니다.(요한복음11:45:-57) 오늘도 똑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보며 어떤 이는 확신을, 어떤 이는 더 강한 불신을 갖죠. 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이는 감동을, 어떤 이는 분노를 일으킵니다. 같은 상황, 같은 말에 이처럼 다른 반응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가야바라는 인물의 처신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여 빌라도에게 넘긴 인물이기도 하죠. 어찌 보면 예수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될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가, 예수님의 행하시는 사역, 즉 인류를 구원하려는 그분의 선한 죽으심에 대해 길을 놓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대립하고, 그분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가 ..
요한복음서묵상46 - 내 마음 앞에 놓인 돌문은 무엇일까요?(요한복음11:28:-44)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우리 문화의 무덤이 땅에 묻는 것이라면 이스라엘의 무덤은 집과 같은 형태입니다. 마치 보관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죠. 보통은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하거나 바위를 뚫어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시신을 안치했죠. 그 공간은 여러 개로 나뉘어 가족들이 함께 사용하는 가족 공동 묘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그래서 입구는 움직이는 돌문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죠. 둥그런 돌로, 굴려서 열고 닫는 식으로 말이죠. 물론 이 돌문은 크고 무거워서 쉽게 열고 닫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은 말씀은 바로 그 돌문을 의미하는 것이죠. 요한복음을 읽노라면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은 여러 차례 대화가 등장하는데요. 그 대화를 곱씹어보면..
요한복음서묵상45 - 원망의 눈물에서 멈추지 말고 기쁨의 눈물로 나아가세요.(요한복음11:28:-37) 마르다와 대화 이후, 이제 마리아와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그녀 또한 예수님께 아쉬움을 토로하죠. 사랑하고 따르는 것과 아쉬움은 별개입니다. 더 믿을수록 바라는 것이 많고, 더 따를수록 의지하는 것이 더 큽니다. 어쩌면 그녀의 아쉬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우리 신앙의 한 단면을 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의지하고 따르는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나의 말에 바로 응답하셔야 하고, 나의 기도에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셔야 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은 내 간구를 들으시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지 우리의..
요한복음서묵상44 - 하나님의 나라는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믿는 우리들을 통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요한복음11:17~27)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5리면 겨우 2Km 정도입니다. 그곳을 오시는 데 4일이 걸렸습니다. 이미 나사로는 죽어 시신의 부패가 시작할 지경에 이르렀죠. 이쯤 되면 모든 이들이 포기했을 것 같아요. 치유라는 것이 살아있을 때 가능한 단어이고, 고침 받는다는 기대도 생명은 붙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간을 허비해 버리셨습니다. 그 이유를 어제 함께 묵상했죠. 어제와 다른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것입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이죠.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치유를 받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기쁨입니다. 아마도 누구나 그 기쁨을 맛보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위험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역전의 기쁨이 있죠. 포기했..
요한복음서묵상43 -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요한복음11:1~16) 오늘은 병든 나사로를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죠. 아마도 예수님은 이 집안과 잘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들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셨다고 부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께 나사로가 깊은 병에 빠졌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당장 달려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틀 동안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는 동안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죠.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병중에 신음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지 않으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결국 죽도록 내버려 두신 셈이 되기도 하죠. 아마도 마르..
요한복음서묵상42 - 무서울 때일수록 그분을 더 찾아야 하고, 흔들릴 때일수록 그분을 더 붙잡아야 합니다.(요한복음10:22~30) 오늘 본문의 성전 봉헌절은 아마도 하누카인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수전절이라고도 하죠. 수전이란 성전을 고쳤다는 의미죠. 이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빌론 유수를 끝내고 귀환했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바빌로니아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이후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바빌로니아는 멸망하고 자연스레 유대 땅도 그 지배하에 놓이죠. 대제국을 이루던 알렉산더가 일찍 죽자 제국은 갈라집니다. 유대 땅은 프로톨레마이 왕조의 지배를 받죠. 식민지배하에 있었지만 오히려 유대문화는 헬라 문화와 만나 번성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식민지배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가죠. 프로톨레마이 왕조가 이집트 기반의 왕조라면,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 기반의 왕조입니다.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지배를 ..
요한복음서묵상41 - 싫을 수는 있어도 정죄하면 안 됩니다.(요한복음10:7~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그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막이죠. 성막은 예배의 처소이자 주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 성막에는 오직 하나의 문이 존재했는데요. 이를 양의 문이라고 했어요.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그분만이 우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그분만이 나를 아시기 때문이죠. 그분만이 유일한 창조주시고, 그분만이 우리를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야다’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같은 발음에 여러 가지 다른 뜻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앎’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가 오..